- 서향의 단점 과감하게 포용, 역발상의 결정체
- 루버와 닮은 외부정원 돌담도 격자로 어우러져 새로움 선사
- 동향 쪽 공간 배치, 층간 소통 아쉬움 두고두고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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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향으로 선 건물에 루버(louver)를 입힘으로써 생생함이 용출하게 만든 부산 금정세무서 건물. 관공서 특유의 좌우대칭을 일정하게 파괴한 점도 눈길을 끈다. |
'남자 나이 40살,/ 더 이상 내가 왜 사는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고도/ 잘 산다. 아니, 잘 견뎌낸다./ 여름 불볕, 육교에서 앵벌이가/ 파리 떼에 빨리며 등을 굽고 있어도/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나도 세상도 말똥 굴러가듯/ 잘도 굴러간다./…(서림, '더 이상 나는-노예11')
건축가도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 같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건축가도 나이 40살 되면 정상적으로 직장생활을 했다면 모든 것이 종종 습관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묻지 않아도/나도 세상도 말똥 굴러가듯/ 잘도 굴러간다'라고 시인은 읊는다. 이를 세상과의 '습관적 관계 맺기'라 부른다.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되면 작가로서의 생활은 끝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창조활동을 하여야 할 사람이 습관적 관계 맺기라는 늪에 빠지면 빠져 나오기가 정말 어렵다.
■'서향으로 배치된 건물'의 난제를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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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공간을 시원하게 뚫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평면이 '죽은 공간' 없이 비교적 잘 짜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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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 관계 맺기를 하면 너도, 나도, 세상도 말똥 굴러가듯 잘도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한 곳이라도 관계 맺기가 단절된다면 그는 당혹해 한다. 예를 들어 집-자가용-전철-버스-학교라는 습관적 관계 맺기로 매일 집에서 학교라는 '선적인 관계'의 출근 패턴에서 갑자기 버스가 고장이 나버렸다면 그는 더 이상 '잘도 굴러'갈 수 없다. 이를 '차단관계'라 부른다. 그래서 버스 대신에 택시를 타고 갔다면 일시적 당혹감은 있었겠지만 다시 나도 세상도 말똥 굴러가듯 잘도 굴러간다.
이 때 잠시 드러나는 새로움은 임시방편이다. 버스는 고장을 고쳐 다시 다니게 되고 새로움은 사라져버린다. 버스노선이 폐쇄되어 사라져 버렸다면 버스 대신에 장기간 대처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 길이 멀더라도 집에서 자가용으로 학교까지 간다고 작정했다면 그 패턴이 익숙해질 때까지 새로움이 출몰할 것이다. 이를 '출몰한 새로움'이라 한다. 이것도 곧 말똥 굴러가듯 잘도 굴러갈 것이다. 습관적 관계 맺기들 속에서 아주 살짝 벗어나 늘 새로움을 주는 관계 맺기로 전환되는 것이 없을까? 그것은 바로 예술작품이다. 좋은 건축물은 주위의 습관적 관계 맺기들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이룬다.
금정세무서는 우리가 기피하는 서향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특히 서쪽 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빛이다. 나도 세상도 말똥 굴러 가듯 잘도 굴러 가는 장소가 아니다. 정면을 서향으로 배치해야 하므로. 게다가 주위 주택가와 저 멀리 떨어진 북쪽의 아파트단지는 투시도 효과로 인해 아주 작게 보인다. 습관적 관계 맺기를 통해서는 풀어 나갈 수 없는 장소다. 그렇다고 서쪽 창마다 블라인드를 설치할 수도 없다. 이 난감한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주위의 소규모 스케일과 어긋나지 않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루버(louver)를 설치하는 방법이다. 루버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채광·인공조명·일조조정(日照調整)·통풍·환기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폭이 좁은 판을 비스듬히 일정 간격을 두고 배열한 것. 밖에서는 실내가 들여다보이지 않고, 실내에서는 밖을 내다보는 데 불편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통풍이나 환기를 하고자 하면 그쪽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관계로 루버를 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채광·인공조명·일조조정에 사용할 경우는 반드시 루버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즉 가로·세로 또는 격자창으로 하든지, 이것들의 변형을 응용해 여러 가지 종류를 택할 수 있다. 광의적으로 이 모두를 루버라 칭할 수 있다.'(인터넷 백과사전 참조)
■ 관공서 특유의 좌우 대칭도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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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으로 구성한 건물 외부의 정원. 루버의 촘촘한 격자와 층층이 쌓인 돌은 서로에게 생생한 느낌을 부여한다.
건축사진가 조명환 |
서향으로 선 건물에 '습관적 관계 맺기'식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금정세무서는 서향에다 동시에 인근의 맥락이 소규모 스케일 위주여서 루버를 설치할 경우 일거양득이다. 그래서 역발상적 생각으로 서향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건축가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모두가 "맞다" 할 때 "아니다"라고 맞서면서, 그것도 일시적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움을 창출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일이다. 해의 위치에 따라 루버에 비치는 음영이 시시각각 달라지므로 이 건축물에서는 늘상 새로움을 얻는다. 햇빛의 강도와 해의 위치에 따라 음영이 늘 달라지므로.
또 하나의 습관적 관계 맺기로부터 벗어남은 관공서의 트레이드마크인 좌우 대칭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10여년 지난 건축물인데도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은 좌우대칭을 선호해왔다. 그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나 기능주의 이후부터 좌우대칭형 건물이 점차 사라졌다. 기능주의에서는 그 이유를 묻고 따지므로. 기능이 우선이지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관공서에서는 최근까지 좌우대칭형 건물을 숭상해 왔다. 금정세무서도 좌우대칭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아있다. 좌측면의 길이가 우측면의 그것보다 길지만 출입구에서 여전히 좌우대칭을 견지하고 있다
외부공간에서 인상적인 것은 돌담들로 구성된 정원이다. 특히 돌담의 돌들과 루버로 촘촘히 구성된 격자와의 만남이 인상적이다. 추상과 구체의 만남이랄까? 구체적인 돌들의 쌓음과 격자의 쌓음, 이 둘을 통해 구체의 의미와 추상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새삼스럽게 인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생생하게 만나야 한다. 문화와 자연은 상호공존하는 것이지 어느 한편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기실은 서로에게 생생한 것이다.
■ 이 건물의 '생생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부평면으로 가보자. 로비가 시원하게 뚫렸다. 2층에서 4층까지. 그 외 인상적인 것은 평면이 '죽은 공간' 없이 비교적 잘 짜져 있는 점이다. 부출입구도 주출입구와 다를 바 없이 로비의 상부가 2~4층까지 뚫렸다. 주출입구와 부출입구를 거의 동등하게 다루었다. 수직공간의 상호관입은 건축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로비 부분을 제외하고 층간의 소통을 위해 애를 쓰지 않은 듯하다. 층간의 상호소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층간의 상호소통이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지대한 역할을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과의 결별이 보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하늘과의 소통은 꼭 필요한 것이리라.
건축가 고성룡(상지 이앤에이·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소속)에 따르면 동향 쪽의 실(室)은 오랜 시간 직원이 거주하는 곳으로, 서향 쪽의 실은 직원이 일시적으로 근무하는 곳으로 원칙을 정하고 실을 배분했단다. 그러나 당혹스럽게 동쪽 면과 서쪽 면의 건축언어가 너무 차이 난다.
이 건축물은 서향을 정면으로 배치하는 대신 공격적으로 루버를 설치한 점은 생생한 맛을 준다. 습관적 관계 맺기를 떠나 새로운 관계 맺기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이 건축물은 새로운 맛을 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시인 정현종은 '장소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장소들은 / 생생한 걸 준비해야 한다/ 생생한 게 준비된다면 / 거기가 곧 머물만한 곳이다 / 물건이든 마음이든 그 무엇이든 / 풍경이든 귀신이든 그 무엇이든 / 생생한 걸 만나지 못하면 / 그건 장소가 아니다./…/ 생생해서 문득 신명 지피고 / 생생해서 온 몸에 싹이 트고 / 생생해서 봄바람이 일지 않으면/ 그건 장소가 아니다./오 장소들의 지루함이여,/ 인류의 시간 속에 어떤 생생함을 / 한 번이라도 맛볼 수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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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언 |
필자의 생각은 '그 어떤 생생함을 한 번이라도 맛볼 수 있는 것인지…'라는 애매한 얼버무림에 대해 명확히 단언할 수 있다. 이 건축물에서는 '그렇다'라고 말이다. 루버라는 건축적 장치에 의하여 금정세무서는 생생함을 준비해두고 있다. 그러나 이 루버가 금정세무서 전체를 생생함으로 덮을 수가 없다. 서쪽 면에서 루버가 주축이면, 루버와 일관된 그 무엇을 동쪽 면에서도 끌어 왔어야 했다. 그리고 생생함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구체와 추상(돌담의 돌들과 격자의 만남), 루버와 맥락 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생생함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었을까? 건축가가 한번 더 생각했더라면 더욱 더 큰 생생함이 준비된 금정세무서가 되었을 것이다.
부산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