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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의 연극이야기 <30> 친일과 저항 사이에서

1940년대 극작술의 귀재 '빙화' 임선규

대중극의 표면에 日 저항 논리 숨겨 대범한 작가의식 드러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30 19:41:02
  •  |   본지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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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 단원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 연극계의 위기는 현격하게 증대되었다. 1937년부터 옥죄어 오던 일제의 친일 압력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의 극단을 망라하는 연극단체를 만들도록 유도했고, 이 정책에 따라 아랑(대표 임선규), 청춘좌(변기종), 호화선(장진), 연극호(김창준), 노동좌(박철원), 조선성악연구회(이동백), 황금좌(성광현), 예원좌(김춘광), 고협(심영) 등의 9개 극단(극단 별 대표 2명)이 모여 연극단체를 결성하였다. 1940년 12월 22일에 결성된 이 연극단체가 '조선연극협회'였다.

비록 조선연극협회가 표면적으로는 분산되어 있던 연극 단체를 모아 효과적으로 육성·발전시킨다는 취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연극을 통폐합하여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통제 수단이었다. 연극을 통해 친일 메시지를 주입하고 일제의 통치에 적극 협력하는 애국(?) 국민을 육성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말했던 국민연극이란, 일제의 통치·침략 정책에 동조하는 친일·어용·목적극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국민연극의 본격적인 시작은 1942년 10월 열린 제 1회 연극경연대회부터였다. 제 1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한 극단과 작품은 모두 5개였는데, 이 중에서 고협이 출품한 '빙화'는 특히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읽는 각도에 따라서 친일 작품이 아니라 반일 작품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 해석의 논란은 주인공 박영철에게서 비롯된다. 박영철은 일제 치하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회의적인 지식인으로 설정되었다. 그는 무언가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고 있었고, 사립학교의 비리를 폭로하는 바람에 연해주로 도망쳐야 했으며, 연해주에서도 일본의 적군인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가담하는 역적(?) 행위를 저질렀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있다. 박영철은 무슨 이유로 일경의 수배를 받고 있었고(반일 모의로 추정됨), 사립학교 비리를 적발했다고는 하나 왜 하필이면 연해주로 이주해야 했으며, 일본을 대변하는 선량한(?) 청년이 등장해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비리에 대해 성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초 고집을 꺾지 않고 일본의 적군에 가담했는가 이다. 이른바 일제의 통치정책에 아부한다는 국민연극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독립운동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박영철 아버지의 일화, 역시 젊은 날 일제에 저항했던 강포수의 사연, 연해주와 만주를 떠도는 실향민들의 정서와 망국민의 설움을 상기시키는 분위기 등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마치 숨겨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박영철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숨겨진 내면 심리를 탐구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보면, 작가 임선규는 표면적으로는 일제의 정책에 동조·협력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조선인의 저항 의식과 향수 그리고 슬픔을 상기시키려는 의도를 작품의 배면에 깔아 두었음을 눈치 챌 수 있다(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그러하다). 가혹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불운한 작가의 고심 어린 대처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대 후반만 해도 임선규는 대중극작가라는 명예롭지 못한 평가를 받았으나, 1940년대 '빙화'를 통해서 대중극의 표면에 저항 논리를 숨기는 대범한 극작술을 구사하여 범상치 않는 작가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임선규는 비록 숨은 작의일망정 작품 속에 담아내어, 자신이 꿈꾸던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관객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이 점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협의 참가작을 열렬히 환호할 수 있었다. 대개의 국민연극이 그렇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연극평론가·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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