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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大 트레일을 연다 <6> 삼척 수로부인길(24㎞)

[창간 63주년 특집] 통일전망대 ~ 부산 650㎞

헌화가·황희·애랑… 관동대로 옛길따라 푸른 설화가 구비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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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호해변·아칠목재·돌서낭 '국시댕이' 옛 이야기 속 8㎞
- 황희 만나는 8.5㎞ 소공대비 곁서 휴식
- 바다 안는 7.5㎞ 한 마을 두 개 道, 고포마을 정취까지
- 해신당 남근 공원 등 옛 7번 국도도 운치


삼척 용화리에서 고포리까지 이어지는 수로부인길(24㎞)이 인기를 얻고 있다. 동해 트레일 도보탐사팀이 삼척 장호초등교 앞의 탐방로 안내판을 살피고 있다. 박창희 기자
'딛배 바회 갓해/ 자바온손 암쇼 노해시고/ 나할 안디 븟하리샤단/ 곶할 것가 받자보리이다'(풀이: 붉은 바위 끝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헌화가'다. 알듯 모를 듯한 향찰로 기록됐지만, 음미할수록 극적 긴장감과 운치가 있다. 문득 옛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수로부인(水路夫人). 신라 성덕왕 때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순정공의 아내라고 한다. 얼마나 미인이었으면 동해의 해용(海龍)이 납치하고, 소 몰던 늙은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에 올라 꽃을 꺾어 바쳤을까.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하는 '해가사(海歌詞)' 또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불린 노래다.

이 여자, 수로부인은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신이성이나 역사성, 문학성 어느 모로 봐도 그렇다. 동해 바닷가에 자취가 남아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스토리텔링 소재가 없다. 백두대간을 파고든 관동대로 옛길을 따라 동해의 푸른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수로부인 이야기

삼척 수로부인길(24㎞)은 용화해수욕장에서 삼척·울진의 경계마을인 고포리까지의 산책로를 일컫는다. 주요 노정은 아칠목재→로즈밸리→사기촌→소공령→길곡리→호산해수욕장→원덕읍 월천리→갈령재 등이다. 산, 바다, 해변, 마을, 재 등을 거치는 최상의 역사탐방 코스다.

이 곳은 조선시대의 9대 간선도로 중 제3로인 관동대로 옛길이다. 한양과 경기 동부, 강원도를 이어주던 관동대로는 대관령을 넘고 강릉 안인역과 삼척 사직역, 용화역, 소공령, 갈령, 울진 망양정을 거쳐 평해에 이르는 대로였다. 전체 길이 920리(약 370㎞)의 관동대로 중 삼척 구간 60리(24㎞)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됐다. 수로부인 설화와 연관있다고 본 것이다. 안내 팸플릿만 있으면 혼자서도 자박자박 걸을 수 있다.

수로부인길 제1코스(8㎞)는 '옛 이야기 속으로' 걷는 길이다. 해안선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근덕면 용화리에서 출발한다.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장호 해변을 벗어나 장호초교 정문 앞에 이르면 수로부인길 안내판을 만난다. 여기서 길은 마을과 산자락을 파고든다. 시멘트 농로가 지겨워질 무렵 산 중턱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옛날엔 이 고개가 무서웠던가 봐요. 그래서 저 아래 주막에서 사람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넘었다고 하잖아요. 언제 산적이나 호랑이가 나타날지 몰라 항상 아찔한 마음으로 넘어다녔다 하여 이곳이 '아칠목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길잡이로 나선 웰컴투삼척시추진협의회 김억연(42)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아찔→아칠→아칠목으로 바뀌는 과정이 흥미롭다. 고갯마루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국시댕이 흔적도 남아 있다. 국시댕이는 고갯길을 넘던 사람들이 무사안녕을 빌며 하나둘씩 주워 올린 돌로 쌓은 일종의 돌서낭. 김 국장은 "강원도에선 돌서낭을 국시댕이라 하며 이정표나 산 짐승 방지용으로 이용됐다"고 말했다.

1코스 종점인 임원리 절터골의 성황목까지는 계곡 물길과 동행한다. 주변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작달막하다. 2002년 이 지역을 초토화시킨 화마의 후유증이다.

■황희 정승을 만나다

황희 정승의 이야기가 얽힌 소공대비.
성황목에서 시작되는 제2코스(8.5㎞)는 '황희 정승을 만나는 길'이다. 길의 중간에 황희 정승과 관련된 소공대비(召公臺碑)가 있다. 황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약 60년 동안 여섯 임금을 섬기며 위국애민을 실천한 청백리다. 소공은 중국 주나라 때 태평성대를 구가한 문왕의 아들로 백성을 편안케 한 인물의 대명사 격이다.

극심한 기근이 들었던 1423년,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은 황희는 관청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고, 백성 구제에 자신의 재산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훗날, 삼척 주민들은 황희가 오가며 쉬었던 산 중턱에 돌탑을 쌓고, 그 자리를 소공대라 부르고 비를 세웠다. 이런 선정비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소공대 자리는 망망 동해와 삼척 임원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훌륭한 조망점이다. 쉬어가기에 좋다.

3코스(7.5㎞)는 '바다를 안고' 걷는 길로 옥원2리에서 호산 둑방길→월천교→갈령재→옛 동해휴게소→고포마을까지 이어진다. 전체적으로 안내판이 잘 붙어 있어 길찾기에 무리가 없다.

고포마을은 가운데 복개천을 두고 양쪽이 행정구역상 강원도와 경상북도로 나뉜다. 한 마을 두 개 도(道)이다. 복개천을 마주보고 있는 앞집에 전화를 하면 시외전화료를 물어야 한다.

■옛 7번 국도의 정취

삼척 갈남리의 해신당 공원.
삼척 땅의 산과 바다는 서로 맞닿아 있다. 바다는 어딜가나 쪽빛이고, 산줄기는 백두대간의 기운을 품어 맑고 늠름하다. 수로부인길과 별개로 옛 7번 국도를 따라 걸어도 운치가 살아난다.

맹방 해수욕장에서 마읍천을 지나 궁촌에 이르는 길이 약 11㎞, 궁촌에서 옛 7번 국도를 따라 초곡→문암→황영조 기념공원→용화까지가 약 7㎞인데 군데군데 볼거리가 즐비하다.

궁촌리는 고려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는 곳이다. 궁촌리에서 가래마을로 넘어가는 사랫재(살해치)는 공양왕의 아들들이 살해당한 곳으로 전해진다. 진위 논란이 있지만, 공양왕과 왕자들의 무덤이 이곳에 실재한다.

궁촌~용화 사이 5.4㎞의 옛 철도부지에는 해양 레일바이크가 설치돼 있고, 근덕면 초곡리에는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영웅 황영조 선수를 기념하는 공원이 들어서 있다.

원덕읍 갈남리의 해신당 공원도 얘깃거리다. 이곳엔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남근숭배민속이 전해진다. 옛날 바다에 총각을 앗긴 처녀(애랑)가 물에 빠져 죽은 뒤 고기가 잡히지 않자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남근을 깎기 시작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신당 공원에 전시된 각양각색의 남근은 단순한 눈요깃감이 아니라 전통의 재현인 셈이다.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다. 2002년 개장 후 지금까지 찾은 방문객이 186만5000여 명, 하루 1000명 꼴이다. 삼척시 관계자는 "단순하게 시작했는데 지금은 세계 성(性)박물관 형태가 됐다"고 했다. 이런 얘깃거리가 있으면 10리, 20리는 그냥 간다.


# 웰컴투삼척시추진협의회 김억연 사무국장

- "풀섶 헤쳐 옛길 찾고 안내 장승 직접 깎아 예산 줄이려고 노력"

삼척 수로부인길을 개척해 운영·관리를 하고 있는 곳은 웰컴투삼척시추진협의회라는 단체다. 낯선 이름이지만 삼척지역에선 꽤나 유명하다. 지난 2000년 창립 후 활발한 지역홍보 활동으로 대통령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김억연(42·사진) 사무국장은 "길을 내는 단체가 아닌데, 하다보니 길에 매달리게 됐다"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찾아오니 보람도 느낀다"고 했다. 김 국장은 수로부인길 안내를 청하자 자신의 트럭을 몰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지난해 6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이곳을 동해 트레일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 국비 지원을 하면서 우리 회원들이 길을 개척해 안내판과 팻말을 세웠지요. 길을 여는 것 보다 관리가 더 힘드네요."

옛길(관동대로)을 찾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한여름 땡볕에 예초기를 들고 풀섶을 헤치며 길의 희미한 흔적을 찾았고, 잔뜩 쌓아둔 화목을 처리하느라 등골이 휠 정도였다. 안내 장승을 만드는 일도 버거웠다.

"예산을 줄이려고 우리가 다 깎고 다듬었어요. 무엇보다 주민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길 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문제는 삼척시인데 여전히 개발 마인드가 강해 웰빙 걷기를 등한시하고 있어요. 이제 바뀌겠죠."

김 사무국장은 자칭타칭 '아웃도어'다. 웰컴투삼척시추진협의회 뿐만 아니라 삼척 산악연맹, 요트협회 등에도 깊숙히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 고성에서 부산까지 동해 트레일이 열리려면 걷기단체들의 네트워킹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며 "삼척 구간만은 우리가 문제없게 해 놓겠다"고 약속했다.


※ 공동기획: 국제신문·(사)걷고싶은부산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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