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휘감고있는 바다…작가에게 창작 영감, 작품 소재로 매력적, 화가에겐 더없는 행운
- 어떤 이는 고독으로 어떤 이는 희망으로…저마다의 느낌 살려 회화로 형상화 작업
- '바다를 그림으로' 예술작업 늘어 날때 새로운 도시이미지 창출에도 한몫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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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바다그림으로 개인전을 여는 전미경 화가가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언필칭 바다의 도시 부산에서 예술가들은 자연스레 바다를 소재나 주제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그 중 표현방식이 가장 직접적이고 뚜렷한 장르는 미술이다. 문학은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쳐야만 하고, 연극이나 춤 등 공연예술은 무대라는 단계를 밟아야만 하는 반면 미술, 특히 회화는 이미지를 직접 그려내고 이를 통해 주제의식을 바로 눈앞에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전시회를 기준으로 살피면, 부산 미술은 확실히 바다와 친숙하다. 지난해 9월 이후 최근 1년 사이 부산의 갤러리에서 열린 바다 관련 전시는 '내 마음의 바다풍경전'(2009년 3월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부산수채화협회) '블루 오션전'(지난 3월 갤러리 이듬) '시 인사이드전'(지난 3월 김재선갤러리) '바다愛전'(지난 8월 신세계 센텀시티 갤러리) 등 10개 가량 꼽을 수 있다. 사실상 다달이 어딘가에서는 열리고 있었던 셈이다.
바다 관련 기관이 장기기획으로 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 부산수채화협회 양홍근 회장의 설명이다.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의 요청으로 지난 3년 동안 그곳 전시실에서 바다 수채화 전시회를 매년 열었다. 2008년 '부산, 바다풍경전', 2009년 '내 마음의 바다풍경전' 그리고 올해 '물의 사색전'이었다.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은 우리 지역의 바다문화를 담당한 기관으로서 미술을 통해 바다와 시민을 이어주려는 뜻이 뚜렷하다." 조금만 둘러보면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바다-예술-시민을 잇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은 것이다.
■부산 갤러리엔 바다가 자주 내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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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철마면 백길리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갤러리李에서 물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태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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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문자'나 '무대'라는 매개장치를 거치지 않고 온몸으로, 통째로 대상을 받고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회화 부문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즐겨 그리는 화가들은 바다와 물의 무엇 때문에 그토록 물가로 다가가 물을 그리는 것일까. 이를 통해 부산을 휘감고 있는 익숙한 존재인 바다가 예술적으로 어떤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과 관련 전시회 참가 빈도 등을 기준으로 부산 화단에서 깊이 있고 꾸준하게 바다를 그려온 화가는 중진 이태호 화가와 젊은 작가군인 전미경 김경환 작가 등을 꼽을 수 있었다. 물론 3년 연속 규모가 큰 바다 주제 전시회를 열어온 부산수채화협회 작가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에는 이런 바닷가 장면이 나온다.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너는 아냐? 늙은 아비 혼자 두고 너는 어딜 갔느냐?/아냐, 영영이야.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이 대화처럼, 같은 것을 놓고도 사람들의 생각과 기억은 곧잘 엇갈리거나 다르다. 같은 대상일지라도, 사람이 그 대상과 맺는 관계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바다를 그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이들을 만나면서 받은 느낌도 이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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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화가의 '고독(Solitude)' 연작 중 한 작품. |
지난해와 올해 '김경환·허필석전'과 '바다愛전' 등에서 바다 그림을 선보인 젊은 작가 김경환의 그림은 그의 젊음답게 직접적이다. 그는 바다를 소재로 '고독'(Solitude)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화폭을 빈틈 없이 메운 것은 물결이다. 직선의 날카로운 느낌과 곡선의 휘어지는 느낌을 절묘하게 섞어놓았는데 색깔은 짙고 어두운 쪽이다. 그림에서는 바다와 그 바다를 보고 있는 화가의 존재만 느껴질 뿐 어떤 다른 요소도 감지되지 않는다. 절제된 형태의 포말과 일렁대는 바다만 뚝 떼어놓았을 뿐인데도, "아! 저것이 고독의 형상이겠구나"하는 느낌은 강렬하다.
전미경 작가는 현재 부산 사하구 무지개공단 끝자락에 있는 예술창작공간 아트 팩토리 인 다대포의 입주작가로 있다. 오는 11월 23일부터 12월 2일까지 해운대 달맞이언덕의 갤러리이듬에서 열 개인전 준비로 낮밤 따로 없이 바쁜 행군을 하고 있는 그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온통 물빛이었다. 개인전에 내놓을 바다그림들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그가 들려주는 '바다에 빠진 계기'는 딱히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런 면까지 있다. "대학 때는 난해한 미니멀리즘 미술 속에서 갑갑해하면서도 그걸 했고, 한쪽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 류의 경향이 있고, 사회에 나와서는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참여미술 쪽에서 활동도 했죠. 그 과정에서도 물의 이미지는 그림에 계속 스며나왔는데 저는 자각하지는 못했어요. 그렇게 뭔가 뚜렷히 잡히거나 뚫리는 느낌 없이 가다가 2007년 쯤에 작품활동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었고 그 뒤로 바다와 물 그림을 본격적으로 했어요. 이걸 해야지 하는 마음도 없었는데도 그렇게 갔는데 지난 한 5년 동안 그린 그림보다 작년과 올해 그린 그림이 더 많을 거예요. 그게 다 물과 바다예요."
부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송도의 거북섬과 등대, 자갈치시장을 휘저으며 자랐던 그는 원래 몸 속에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던 작가였다. 먼 길을 돌아서 물과 다시 만난 그는 바다 수면의 이미지에서 "끝이 아니라 삶이 순환하는 과정 중 하나로서 죽음이나 이별을 보고 거기에서 반짝이는 빛"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물을 재발견하고 끄집어냄으로써 되살아난 작가였다.
■도시 이미지 창출의 밑바탕 활용 가능
올해 환갑을 맞이한 중진작가로서 부산 화단에서 존재감이 뚜렷한 이태호 화가에게선 먼 길을 뚫고 온 예술가의 연륜이 있었다. 부산 기장군 철마면 백길리의 갤러리李에서 21년째 살고 있는 그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연화도에 바다낚시를 다녀온 직후 정신 없이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어떤 기척을 느끼고 한 번 주제를 잡으면 집중해서 파고들어 40~50점 정도를 그려내는 작업 경향을 그는 보여왔다. 20대 때의 음화(네거티브) 이미지 작업을 시작으로 구름, 소나무, 억새 등이 그랬다.
"2009년 들어선 뒤 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물 표면의 일렁이는 리듬감, 그런 리듬 자체가 삶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크더라고요. 지금까지 옳고 그르고 이를 분별하고 하는 그런 일에 삶의 70~80%를 써왔다면 이제는 그렇게 일렁임 자체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나이가 된 걸까요." 그의 물결 그림은 먹을 써서 검은 톤이되 억눌러진 느낌이 아니라 살아있는 리듬감으로 빛이 난다.
전미경 작가의 말이 인상 깊다. "물이나 바다를 그리고 있는 화가들은 무척 많습니다. 저마다 사연과 주제는 다르겠지만요." 그만큼 물과 그 총체로서 바다는 예술가 또는 화가에게 매력적인 존재인 셈이다. 천변만화의 형상에 깊고 넓고 다양한 영감을 주는 재료인 바다를 부산은 지천으로 갖고 있다. 행운으로 받아들일 만한 환경이다. 제주도에 간 여행객들은 기당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거장 변시지 화가의 독특한 제주 바다 그림을 접하고는 그 이미지를 고스란히 갖고와 제주도의 모습으로 간직하는 사례가 많다. 부산도 '물결'을 부산 예술 곁으로 더 가까이 끌어들인다면 거기서 생각지 못한 새로운 도시 이미지가 태어날 가능성이 무척 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