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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억 작가의 '6·25동란' |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국문화단체 총연합 부산지부의 구국대(대장 유치환)는 이미 발족해 활동에 들어갔다. 8월 들어 수도사단이 영주를 탈환하면서 전세는 호전되어 갔고 화가들의 종군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군화가들이 항상 전선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고정적인 월급은 없었지만 군에서 어쩌다가 지급되는 식량과 배급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군이 생사여탈을 좌우하던 전시에 군복을 입고 완장을 찼으며 야간통행증까지 지녔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신분보장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 상황에서 호구지책이 되어주기도 했으니 상당한 예우를 받았던 셈이다. 이외에도 민간인 차량승차, 일선 지역 출입 외 장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사단장 숙소에서 같이 기거하는 등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종군화가단 활동이 자신 한 몸 거두기는 족했으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혈혈단신 월남 또는 피란했거나 총각인 경우, 부산지역에 기반을 둔 작가들은 생활의 어려움을 덜고, 징집이나 제 2국민병을 피할 수 있는 방편이 되어주었다. 또 이북에서 피란 온 작가들의 경우 자신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을 거느린 사람들의 경우는 달랐다. 가족들까지 부양할 만큼 넉넉한 지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사관 교육을 받고도 가족들의 생계 때문에 장우성은 종군화가를 포기했고, 김경승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정으로 가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정훈국 미술대장이었던 강경모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에 모인 많은 미술인들과 미술교사들이 미술대에 합류함으로써 규모가 커졌고 특히 종군작가들의 활동이 돋보였다. 그는 "1·4 후퇴 때 일부는 청량리에서 열차 편으로 내려가고 나머지 대원들은 정훈국 연예대원들과 함께 인솔해서 인천에서 LST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이 무렵 대구에 모여든 화가들이 미술대와는 별도로 종군 화가단을 만든 것입니다. 종군 화가단이 결성된 지 얼마 안 되어 화가단과 미술대원 20여 명이 삼척을 거쳐 강릉까지 종군했습니다"고 전한다.
서울수복 후 문총은 10월 9일 '타공문화인 궐기대회'를 국립극장(현 서울시의회)에서 열었고 서울신문사에 모여 새로운 임원을 선출해서 고희동을 대장으로, 부대장에 이하윤과 모윤숙, 사무국장에 박목월, 차장에 최인욱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와 급습하는 동장군으로 서울을 다시 인민군의 손에 넘겨주게 되면서 이들은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여 1951년 3월, 부산극장에서 '3·1절 경축기념 예술대회'를 열었다. 또 문총 산하 구국대는 선전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 가두에서 사진전과 포스터전을 지속적으로 열었다. 1951년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육군 정훈국 주최로 제1회 육해공군 합동 위령제를 개최했고 9·28 수도탈환 1주년을 기념해 전쟁기록화를 비롯해 종군스케치 등 100여 점을 전 외교구락부 자리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국민대 초빙교수·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