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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석굴에 모셔진 부처님의 열반상. |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도 죽음은 삶의 저편으로 밀려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불현듯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우리 곁에 찾아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은 언제나 애통하고 처음인 듯 고통스런 사건이 된다. 어쩌면 삶이란 죽음이라는 사건의 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연의 다른 모습이다.
여기, 부처님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의 죽음은 범부의 그것과 달리 '열반'이라 한다. 원래 열반이란 모든 번뇌와 고통이 사라진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나 부처님이나 스님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열반경은 소승열반경과 대승열반경이 있다. 소승열반경이 부처님의 생애와 열반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 열반 후의 사리분배 등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둔 반면, 대승열반경은 부처님의 열반이 갖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가 강조돼 있다.
쿠시나가라성 근처 아이라발제하 강가의 사라쌍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 한다. 음력 2월 15일 하루 낮, 하루 밤 사이 부처님은 생애 최후의 설법을 하시려 하고, 제자들은 비통함에 젖어 있다.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안목을 설해주시던 스승이 떠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담담히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인 법을 의지하여 정진하라(自燈明 法燈明)"고.
이 말씀은 열반경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부처님의 열반은 육신의 죽음을 넘어 법의 몸으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인간 석가모니는 떠나지만 법신인 진리로서의 부처님은 영원하니 그 법을 의지하여 정진하라 당부하는 것이다. 또한 자등명 하라는 말씀 속에는 열반경의 또 다른 대의인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이 녹아 있다. 누구에게나 부처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말이다. 이 소식은 로또당첨보다 더 기쁜 소식이지만 귀 기울여 듣는 이가 많지 않다.
열반경에 천제라는 말이 등장한다. '천제'란 잇찬티카(icchantica)의 음사로 일천제를 줄인 말이다. 선근이 끊어진 사람, 혹은 믿음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 그래서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열반경의 후미에 천제까지도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모든 존재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인 셈이다. 지금 아무리 어리석고 사악하여 진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부처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삶을 파고 들 순간이 올 것이고 그러면 부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열반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열반경에는 부처님의 뒤를 이어 열반의 길에 들어설 수많은 이들을 위해 열반의 네 가지 덕을 설해 놓고 있다. 열반은 이러이러해서 좋으니 이 길로 오라는 손짓과 같다. 부처님의 참 몸인 법신 즉 존재의 실상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항상하는 것이며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며 더러운 것이 아니라 청정한 것이며 나와 남이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가 성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성취되어 있으니 삶의 무상함과 괴로운 삶을 건너 영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인간 석가모니의 열반은 육신으로서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 주는 대사건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죽음은 분명 다르다. 열반경은 인간 석가모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 보여준다. 부처님처럼 생사를 초월하고 영원히 상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진 불성의 씨앗을 발아시켜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가 남는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인 "세상은 무상하므로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말씀처럼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를 행하며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길이 제시되고 있다. 열반경은 죽음을 통해 죽음을 뛰어 넘는 길을 열어 보이고 있다.
미련한 자는 바로 옆에서 죽음을 목격해도 남의 일로 여기고 지혜로운 자는 천리만리 먼 곳의 죽음 소식만 들어도 바로 나의 일처럼 여기고 삶의 무상함을 뛰어 넘으려 발심한다고 했다. 저 멀리 쿠시나가라성에서 들려온 죽음의 소식은 과연 어떤 발심을 일으킬 것인가?
정해학당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