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만큼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소재도 없을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장이모우 감독의 '산사나무 아래' 역시 아주 오랫동안 많은 시인들과 많은 작가들을 통해 전해오던 그런 사랑에 관한 영화다.
때는 문화혁명기. 혁명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으로 현장교육을 떠난 십대 소녀 징치우는 그곳에서 탐사대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던 청년 라오산을 만나게 된다. 운명처럼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은 징치우가 혁명 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후에도 계속 된다. 비록 그들의 사랑의 방식은 수줍고 서투르지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변치 않는 사랑'을 믿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담대하고, 누구보다 절실하게 자신들의 사랑을 발전시켜 나간다. 하지만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라오산이 백혈병에 걸리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그들이 처음 만난 시골마을 어귀에 서 있던 산사나무를 사랑의 정표로 간직한 채 징치우와 라오산은 그들의 일생에 있어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마무리한다.
'산사나무 아래'에 담긴 가을하늘만큼이나 맑은 사랑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라면, 이 순수하고 소박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다름 아닌 장이모우라는 점은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장이모우는 '영웅', '연인', '황후화'와 같은 이른바 '중국판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최근에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오페라 연출 등을 통해 무대 연출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예술가다. 중국 5세대 감독의 대표주자로 명성을 떨치던 초기 시절부터 장대하고 화려한 스펙터클의 대가로 자리 잡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이모우의 작품 속에는 늘 창조주에 비견할 수 있는 예술가의 욕망이 드러나 있었다. 반면, 이 영화는 창작자의 욕망이 철저하게 배제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마치 리얼리즘 계열의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조자의 위치에 머무르면서, 영화 속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산사나무 아래'는 1999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책상 서랍 속의 동화'와 더불어 장이모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이색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배제된 것은 감독의 욕망만이 아니다. '산사나무 아래'는 현대중국사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문화혁명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역사적인 문제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시대성이나 역사성 등이 철저히 배제된 탓인지 이 작품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동안 다듬어진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연인들의 이야기에 무방비상태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실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순수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인물들이 실재 인물들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강력한 힘으로 관객들을 견인하는 요소다.
그런 점에서 '산사나무 아래'를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런 비평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혹은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엔가 꿈꾸었던 순수한 사랑을 되새겨보는 일이다.
김이석 동의대 영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