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를 쓰는 아이들도 ( )를 할 때는 표준어를 쓴다"는 사실에 ( )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이 문제의 답은 '소꿉놀이'다.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의 언어발달은 3세에서 6세 때 완성된다. 이 때 배운 언어가 자기의 모국어가 된다.
아무리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말 배우는 시기에 시골에 있는 할머니에게 맡겨 길러질 경우에 아이의 모국어는 자라난 시골말이다.
이러한 모국어는 이성적인 사고, 의도적인 노력 없이는 평생을 함께 하는 숨길 수 없는 증거물이 된다.
서울말을 열심히 배운 경상도 여자들도 난처한 상황에 도달하면 갑자기 '우짜노'하는 감탄사가 튀어 나온다.
또 첩보 영화를 보면 국적을 숨기고 완벽하게 위장한 첩자라도 꿈을 꾸거나 무의식적인 독백 중에 자신의 모국어가 나와 신분이 들통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사투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 지배받고 있다가 그 의식이 제어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가상적인 역할 놀이다. 본능에 지배받는 놀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소꿉놀이는 자신의 모국어보다 이상화된 모델인 표준어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빠, 엄마 역할을 모델로 삼아 흉내내기 놀이를 할 경우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경상도 아이들도 '왔다, 밥 도, 자자'가 아니라 '여보 나 왔습니다. 밥 주세요, 잠을 잡시다'가 일상적인 소꿉놀이의 대화가 된다.
예전에 직장 생활을 하는 며느리가 시골에 있는 시어머니를 불러다가 집안 일을 시키고 애를 보게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시어머니는 며느리 보는 앞에서 손자와 같이 놀면서 손자에게 말을 가르쳤다.
비행기 모형을 들고 이기 '비행구'다. '비행구 따라 해라.' 가위를 들고 이건 '가시개'하고 가르치고 혀를 내고 '쌨바닥'이라고 가르쳤다. 이를 본 며느리는 다음부터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아마 며느리는 아이의 모국어가 시어머니의 시골말이 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경상도 말로 '동두깨비' 혹은 '반주깨놀이, 반지깨'라고 한다.
일부지역(진양)에서는 두 낱말이 서로 결합해서 '동지깨'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단어의 결합은 사이를 뜻하는 '새'와 중간에 먹는 음식인 '참'이 결합해 '새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방법이다.
'동두깨비'는 '독 두깨비' 즉 단지나 독이 깨진 사금파리를 의미하는 낱말로 옛날 아이들이 그릇 대용으로 쓰던 물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또한 '반주깨'는 '반느질 고리'를 의미하는 데, 여기에 인형이나 작은 살림살이를 담아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반주깨 놀이'라고 한다.
경상도 말의 특이한 낱말로 보이는 여러 단어들은 옛말의 흔적이 남아 있거나 기억상으로 편리한 형태로 고정하여 만든 합리적인 것들이 많다. 이런 어휘들은 우리말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의식세계를 내포하는 가치 있는 것이다.
'토마토'는 외래어로 고유어로 대체할 만한 다른 낱말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경상도 말에는 '토마토'가 '땅에서 나는 감'이란 뜻으로 '땅감'으로 불린다. 나무에 열리는 홍시나 단감 말고도 그 모양이 비슷한 토마토를 '땅감'으로 부른다면 굳이 '토마토'란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어휘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지진'은 한자어이다. 그러나 경상도말에서는 '땅에서 나는 불'이라 '땅불'이라 한다. 지진보다 '땅불'이 낱말의 뜻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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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열 |
이처럼 경상도 말의 어휘를 어색하고 낯설게 보는 것은 그 낱말이 가진 멋진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햇살이 부채살처럼 솟아오르는 모양처럼 이해한 사람들은 노을을 '북살'이라고 자연스레 표현한다. 나불거리는 파도를 '나부리'라고 표현 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나불'을 놔 두고 '파도(波濤)'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 관념성이 어리석은 것이다. / 이근열 부경대 국문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