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친이 쓴 글 모티브로 한 스릴러물
- AI 시대 인간실존에 관한 고민 녹여
- ‘얼굴’ 찍고 저예산 영화 노하우 쌓아
- 장르 넘나드는 창작 원동력은 ‘결핍’
- “새로운 작업 도전… 수치심 내려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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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예산 영화 ‘실낙원’을 공개한 연상호 감독이 인터뷰를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견이 있나. 연상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발 빠르게 창작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감독이다. ‘계시록’부터 ‘얼굴(2025)’, ‘군체’ ‘실낙원(2026)’까지 지난해부터 올해 내놓은 영화만 무려 4편. 그 사이 넷플릭스 일본 오리지널 시리즈 ‘가스인간’ 각본 작업까지 했으니, 엄청난 창작력이다.
작품 수도 수지만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능력은 더 놀랍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로 이름을 알린 후 ‘부산행’(2016)으로 100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상업영화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일찍이 OTT로도 선회해 ‘지옥’(2021), ‘정이’(2023), ‘기생수: 더 그레이’(2024) 등도 연출했다. ‘실낙원’은 상업영화 감독으로 입지를 다진 연상호가 내놓은 저예산 영화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업계에서 연상호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걸까. 연상호를 만나러 가는 길.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인간성의 본질 묻는 ‘실낙원’
‘실낙원’은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김현주)에게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류선우(배현성)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실낙원’의 출발은 연 감독 어머니가 썼다는 세 쪽 분량의 글이다. 무시무시한 악행을 저지른 자식과 그럼에도 그를 품으려는 어머니의 복잡미묘한 감정선을 그린 글이다. 해당 글에 매료된 연 감독은 어머니로부터 원안을 사서 2020년 ‘펑크’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후 이야기는 오성은 작가의 소설 ‘블랙 인페르노’로 확장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변형을 거쳐 나온 게 지금의 ‘실낙원’이다.
“‘지옥’을 같이 작업한 최규석 작가가 자기 부모님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작품을 썼다. 그게 무척 부러웠다. 가족이 되게 가까울 것 같지만, 각 잡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지 않나. 그렇게 부러워하던 찰나에 어머니 글을 본 거다. 그게 2020년. 이후 ‘엄마가 이 글을 쓰게 된 심리가 뭘까’를 계속 고민하고 관찰한 게 지금에 이르게 됐다.”
그렇다면 연 감독은 작품을 찍으면서 어머니의 심리를 알게 됐을까. 답은 의외였다. “결론은 ‘알 수 없다’였다”고. 그리고 알 수 없는 마음이 ‘실낙원’을 실존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게 했다. “내가 미대 출신인데, 대학교 1학년 때 술을 마시면서 예술에 관한 토론을 많이 했다. 그때 자주 한 토론 중 하나가 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 심리였다. 실존에 관한 토론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지금 AI가 중요한 존재가 된 시대에 다시 의미 있게 질문하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연 감독은 ‘실낙원’이 AI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묻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AI가 집단지성을 통해 도출된 보편성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면, 인간은 그 보편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아마도 관객은 엄마 류소영의 심리를 100%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바로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라 생각한다. 관객 각자가 소영의 마지막 선택을 놓고 토론하면서 인간 실존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연 감독은 초기작부터 줄곧 체제와 조직, 혹은 그 안에 놓인 개인을 꾸준히 탐구해 왔다. “어릴 때 즐겨 본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등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 수 없는 체제에 대한 공포에 말이다. 요즘 어떤 생각이 드냐면, 우리가 실체가 없다고 말하던 그 보이지 않는 체제가 실체를 갖게 된 게 AI 같다. 우리는 매일 AI와 대화를 나누지만 여전히 그 실체를 알 수 없지 않나.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AI와 인간, 보편성과 개별성의 싸움에 마음이 동하는 것 같다.”
■‘결핍’에서 비롯되는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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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실낙원’의 한 장면. 이 영화는 9년 전 실종된 아들이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로, 인간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CJ ENM 제공 |
실낙원은 ‘얼굴’에 이은 연 감독의 또 다른 저예산 프로젝트다. 20명의 소수 정예 제작진과 12.5회 차의 짧은 촬영으로 이뤄진 ‘얼굴’은 날로 높아지는 제작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제작비 대비 55배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투자사의 허락이 떨어져야 제작에 돌입했던 기존 관성에서 벗어난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얼굴’를 통과하며 얻은 경험은 ‘실낙원’을 만드는 데 큰 동력이 됐다. 노하우도 생겼다.
연 감독은 “회차가 늘면 당연히 비용이 늘기 때문에 최대 14회차를 넘지 않도록 계획을 짠다”며 중요한 건 “3주를 넘기지 않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배우든 스태프든 한 달은 부담스러워하지만, 3주라고 하면 흔쾌히 ‘그럼 해보지, 뭐’라고 한다”고. ‘얼굴’에서 경험한 시행착오 역시 ‘실낙원’에 영향을 미쳤다. “‘얼굴’은 약속한 지분을 스태프들과 잘 나눴다. 다만 처음이다 보니 정산에서 정교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 보너스 개념으로 돈을 더 지급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실낙원’은 초반부터 조금 더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갔다. 그러다 보니 예산도 5억 원으로 조금 더 늘어났다”고 말했다.
저예산 영화를 찍을 때 지키는 자기만의 ‘원칙’도 있다. 첫째, 독립 영화 제작 지원은 받지 말 것. 둘째, 예술영화 전용관에 영화 상영 일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독립영화 인정 제도를 신청하지 말 것. ‘상업 영화를 하는 사람이 독립 영화계의 구조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생긴 원칙인 셈이다. 독립영화 구조를 흔들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 구조가 조금 더 다양하게 열렸으면 하는 마음은 강해 보였다. “체계가 있는 배급사에서 저예산 영화를 제작·배급하는 브랜드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미국의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같은. 한국에도 이전엔 아트하우스가 있었는데, 없어지면서 여유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사실 여유가 없을 때 더더욱 저예산 영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게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이쯤에서 물었다.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오가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오는지. 그에게서 ‘결핍’이란 답이 돌아왔다. “‘얼굴’ 때는 기존 방식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창작하는 사람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되니까 ‘새로운 영혼을 만들려면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작 방식 자체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본 거다.”
여기에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나눈 대화도 영향을 미쳤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극 중 롱테이크 장면은 어떻게 설계한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시간이 없어서 빨리 찍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라는 것이다. 그때 ‘아, 영화의 미학이라는 것은 결핍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후 의도적으로 그런 환경을 만들려고 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는 비결로는 ‘수치심 없는 태도’를 꼽았다. “수치심이 없어야 한다. 창작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자기 검열이거든. 이 지점에서 나는 믿음이 있는데, 영화라는 게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팀원들과 짐을 나누는 단체 경기와 유사하기에, 내가 가진 수치심은 어차피 다른 데서 커트(보완)가 된다. 같은 팀 앞에서 ‘나의 부족이 들통나면 부끄러운데’ 이럴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런 믿음이 있기에 수치심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정시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