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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주(맨 오른쪽) 회장과 라이도쿠 신지(오른쪽에서 두번째) 씨 부부 일행. |
"'생명의 은인'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혈육이라도 초청해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엄상주(80) 복산약품(주) 회장은 지난 19일 어릴 때 물에 빠져 익사 직전이던 자신을 구해 준 일본인 유족을 3박4일 일정으로 국내로 초청, 대(代)를 뛰어넘은 보은의 행사를 가졌다.
엄 회장과 일본인의 인연은 75년 전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5세 때인 1932년 여름 고향인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해량리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가에서 멱을 감다 물웅덩이에 빠졌다. 때마침 인근에 있던 일본인 라이도쿠 후사지로(1988년 작고) 씨가 달려와 그물을 던져 강 밖으로 건져올렸다. 이미 의식을 잃고 있던 엄 회장은 라이도쿠씨의 인공호흡 끝에 살아날 수 있었다.
해방과 함께 라이도쿠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엄 회장은 "어릴 때 일이라 기억이 없었는데 어머니(작고)로 부터 저의 생명을 구해준 고마운 일본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러나 아는 것이라곤 라이도쿠라는 성(姓) 뿐이어서 찾을 길이 없었는데 정말 몇년 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털어놨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간 200여년 동안 이어져 성신교린의 역사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조선통신사 일본연락협의회 마쓰바라 회장과의 만남에서였다.
조선통신사문화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인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이 마쓰바라 회장의 부산 방문 때 엄 회장을 저녁 자리에 초대한 것이다. 엄 회장은 이 자리에서 "내 생명의 은인이 일본인인데, 라이도쿠라는 성밖에 모른다"고 하자 마쓰바라 회장은 "라이도쿠라는 성의 집성촌이 일본 쓰시마이므로 한번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마쓰바라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현재 쓰시마에 살고 있는 라이도쿠 신지(73) 씨의 선친이 경남 하동에서 생활했다는 것. 엄 회장을 구한 라이도쿠 후사지로 씨는 경남 하동에서 자전거 수리점을 했는데, 지금도 막내 아들(63)이 가업을 이어 자전거 상회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엄 회장이 찾던 라이도쿠씨 가문이 틀림없었다.
엄 회장은 지난 2005년 1월 쓰시마를 찾아 생명의 은인인 라이도쿠 후사지로 씨의 묘소를 찾은데 이어 이번에 그의 혈육인 둘째 아들 라이도쿠 신지 씨 부부와 라이도쿠 신지 씨 부인의 여동생 부부 등 4명을 한국으로 초청한 것이다.
엄 회장은 지난 20일 라이도쿠 신지 씨 일행과 함께 경남 하동을 찾았다. 라이도쿠 후사지로 씨가 자전거 수리점을 했던 곳은 4층 짜리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당시 멱을 감았던 섬진강은 그날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엄 회장은 라이도쿠 신지 씨에게 "이 강에서 멱을 감다 빠진 나를 당신의 아버지가 구해줬다"고 설명했다.
섬진강 제방에 서서 75년 전 기억을 더듬던 엄 회장은 "고인이 된 생명의 은인을 대신해 유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 홀가분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하동에서 태어나 해방직전까지 살았던 라이도쿠 신지 씨도 엄 회장의 초청으로 이렇게 '고향'이자 아버지의 자전거 수리점 터를 다시 찾을 줄 몰랐다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3박4일간 부산 하동 여수 경주 등을 두루 둘러본 라이도쿠 신지 씨 일행은 22일 "엄 회장이 아버지와의 인연을 잊지 않고 이렇게 초청하고 극진하게 대접해줘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쓰시마행 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