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부산 동구 초량동 속칭 '텍사스촌'에서 한 러시아 여성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피해 여성 대부분이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를 할 수 없어 이를 악용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부산 동부경찰서는 귀가 중이던 여성을 폭행하고 금품을 가로채려 한 혐의(강도상해)로 이모(28)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지난해 9월 9일 오전 6시께 부산 동구 초량동 속칭 '텍사스촌'에서 귀가 중이던 러시아인 A(여·36) 씨를 마구 때려 금품을 빼앗으려다 여의치 않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A 씨는 갖고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뿌려 위기를 모면했지만 얼굴과 팔,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A 씨는 사고를 당한 뒤 곧장 경찰에 신고했으나 용의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경찰이 텍사스촌 일대에서 일하는 러시아 여성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A 씨는 지난 5월 사고를 당한 장소에서 이 씨를 목격한 뒤 경찰에 신고했고, 결국 사건 8개월 만에 이 씨는 덜미가 잡혔다.

경찰조사 결과 이 씨는 텍사스촌에서 일하는 러시아인 대부분이 국내에 은행계좌를 개설하지 않아 많은 현금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점과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신고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범행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이 씨는 범행 후에도 버젓이 같은 장소에 나타나는 대범함을 보였다. 경찰조사에서 A 씨는 "오죽했으면 호신용 스프레이까지 갖고 다니겠느냐"며 "우리 같은 러시아 여성을 노리는 강도가 많아 대부분이 두려움에 떨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이 지난해 텍사스촌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이 일대에는 러시아인 300여 명이 주점 등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90% 이상은 3개월짜리 단기 관광비자로 입국해 취업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밝혀지지 않은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할 경우 그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텍사스촌에는 러시아 여성 외에도 필리핀 여성도 상당수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은 '연예 비자'를 발급받아 취업에 지장이 없어 범죄에 노출되는 사례는 덜한 편이다.

경찰 관계자는 "외국인 관련 범죄의 경우 외국인 피의자는 많아도 피해자는 거의 없는 상태다. 외국인들이 신분 노출을 꺼려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아 현황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살림의 정경숙 소장은 "신고할 경우 강제 추방 등의 조치를 당하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해 쉽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며 "피해여성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