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자연예술인협회 성백(오른쪽) 대표가 부산 서구 서대신동 꽃마을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완성한 '구덕령 산적 이야기 벽화'를 살펴보고 있다. 벽화에는 구덕령에서 산적을 만난 보부상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 조상 대대로 구전되는 지역사나 흑백사진 한 장에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있는 법
- 감만동 이름 유래도 고려시대 최영 장군, 왜구 토벌했다고 붙여졌다는데…
- 해방 직후의 삶, 한국전쟁 상처도 잘만 풀어나가면 훌륭한 스토리텔링
- 서대신동 꽃마을, 산적 벽화처럼 지역민 참여시켜 예술로 승화시키면 성공사례 될 수 있어

'감만삼대'와 '구덕령 산적 이야기'는 스토리텔링의 성공 요소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특히 스토리의 3요소 즉 인물, 사건, 배경이 구체적이다. 최근에 소개된 스토리텔링 중에서는 잘 된 현장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하고 물으면 대답이 궁해진다. 스토리텔링을 입체적으로 요리하지 못했거나, 감동을 줄만큼 '종합 기획'이 안되고 있다는 얘기다.

■ 감만삼대 이야기

	미군병사가 찍은 1951년 부산 감만동 전경으로, '감만삼대' 책자에 소개돼 있다.

부산 남구 감만1동 주민자치회가 펴낸 '감만삼대(三代)'는 지역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기존 홍보 책자와 차별화 된다. 70쪽 안팎의 이 책자에는 '감만 할아버지'가 옛날 사진과 함께 감만동의 과거를 소개하고, '감만 씨'가 오늘 현재를, '감만이'가 내일의 모습을 각각 이야기 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의 원석도 눈에 띈다. 최영 장군과 감만동의 유래가 그 하나다. 책자를 기획하고 집필에 참가한 감만1동 김재환(73) 주민자치위원장은 "고려시대 최영 장군이 이곳에서 왜구를 무찔렀다고 해서 '감만'(戡蠻·오랑캐를 물리치다는 뜻)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면서 "오늘날 무민사가 그것을 간접 증언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무민사는 최영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최영 장군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고 있다.

'감만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얌생이꾼' 유래담과 '적기만 보물탐사' 이야기도 흥미롭기 그지 없다.

"해방 직후의 일이지. 감만동 바닷가의 옛 일본군 보급 창고 주변엔 각처에서 모인 얌생이꾼들이 설쳤어. 처음엔 철조망 울 밖에 염소를 매어두었다가 느슨해진 철조망 안으로 고삐풀린 염소가 들어가면 따라들어가 이것 저것 물건을 훔쳐 나왔다는 거야.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군에게 손짓 발짓 애걸복걸하니까 미군도 들여보내줬다고 해. 그후 얌생이꾼은 상습적인 좀도둑을 일컫는 말이 됐구먼."

"적기만 보물탐사는 결국 해프닝으로 묻혔지. 일제 강점기때 일본군이 어마어마한 보석과 보물을 적기만 어딘가에 숨겨두고는 패망하자 그냥 돌아갔다는 거야. 1960년도에 이곳의 비밀지도가 발견돼 눈이 번쩍 뜨였지.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했어. 1982년엔 발굴팀이 수중통로를 발견했고 이듬해엔 콘크리트 구조물까지 찾았으나, 더 진척이 되진 않았어. 영화 같은 얘기지만, 아직도 미련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봐."

■ 풀지 못한 궁금증

여기까지는 좋다. 감만동의 역사와 산업, 교육, 행정, 복지 등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내용들이 말랑말랑하게 구워져 입맛을 돋운다. 김재환 자치위원장은 "지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풀어내니까 세대간의 공감은 물론 한층 생동감있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호기심만 자극하고 궁금증을 풀지 못한 건 아쉬움이다. '1951년 감만동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돼 있을까? 만약 이러한 의문을 풀어냈더라면 이야기의 시공간이 달라진다. 화제의 사진을 발굴해 남구청 등에 제공한 김한근(54) 부산불교역사연구소장은 "사진 속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아마 지금 60대 후반쯤 됐을 것이다. 실존 인물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를 높이는 후속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구덕령 산적 이야기

"부산 서구 서대신동 꽃마을이 있는 구덕령 고갯길에 산적들이 있었어요. 산적바위에 숨어 있다가 보부상이나 장꾼이 지나가면 습격하다시피 나타나 돈이나 물건을 빼앗곤 했지. 산적을 만난 보부상과 장꾼들은 벌벌 떨면서 '살려달라'고 빌곤 했대요. 이 고갯길은 구덕산과 엄광산 사이의 해발 226m로,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용하던 산길이었어요. 19세기 말 부산항 개항 이후엔 부산포와 낙동강 옆 구포장을 연결하던 유일한 지름길이었다고 해요. 산적 피해가 늘어나자 사람들이 꾀를 냈지. 산적바위가 보이는 반대편 높은 지점에 망을 보는 망바위를 만들어 도적을 피해서 가기도 했다는군. 지금은 누구나 즐겨 찾는 등산로가 되었지만, 옛날엔 무시무시한 고갯길이었단 말씀이야."

서대신동 꽃마을의 구덕문화공원 진입로 담장에는 이 같은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완성돼 있다. 아크릴과 도자를 활용한 벽화에는 보부상들이 꽃마을을 지나가는 모습과 산적에게 붙잡혀 문건을 빼앗기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 등이 해학적으로 표현돼 있다.

올해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벽화 작업을 진행한 부산자연예술인협회 성백(36) 대표는 "지난 4월부터 작가와 지역주민, 아이들을 참가시켜 교육을 해가며 공동작업을 진행했다"면서 "꽃마을의 산적 이야기를 처음으로 발굴해 스토리텔링 벽화를 만들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성 대표는 "구덕령 산적 벽화를 토대로 내년에는 스토리텔링 북과 음악, 연극 등 다양한 예술 형태로 꾸며볼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꽃마을의 '문화마을 프로젝트' 구상을 현실화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꽃마을은 부산시 창조도시본부가 추진 중인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구역이기도 해 성 대표의 '문화마을 프로젝트' 구상이 의미있는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다. 꽃마을 스토리가 어떤 콘텐츠로 창조될 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

- 원석을 보석으로 다듬고 빛내는 과정, 이야기 발굴하고 전문가 키워야

스토리텔링 전성시대다. 이젠 어떤 콘텐츠가 흥행에 성공해도 '스토리텔링이 좋았다'고 하고, 문화산업과 관광, 교육의 미래도 스토리텔링의 잣대로 가늠하려 한다. 부산시를 비롯해 전국의 각 지자체들은 스토리텔링 관련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고, '스토리텔링 개발' '스토리 발굴' 등의 뉴스도 거의 일상화 되었다.

관련 행사도 줄을 잇고 있다. 지난달 부산시가 제1회 산복도로 스토리텔링 공모전 결과를 발표했고, 이달들어 부산문화재단이 '부산문화, 스토리텔링하다' 토론회를 열었다. 이어 부산대 사학과는 '스토리텔링과 관광문화자원 디자인'이란 특강을 마련했다.

지난 1일 부산문화재단이 개최한 스토리텔링 토론회에서는 의미있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주제 발표에 나선 부경대 채영희(국문학과) 교수는 "미국 UCLA에서 공부할 때 분야별 전문가 300여 명이 모여 '집단창작'하는 것을 봤다"면서 "부산의 문화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스토리 뱅크와 전문인력 뱅크 그리고 이들에 대한 네트워크 구축이 긴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세계적 흥행작 '해리포터'를 보면 '텔링(telling)'보다 '씽킹(thinking)'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며 "스토리텔링은 곧 사고의 힘이자 융합의 산물일 것"이라고 정리했다.

전남 나주시에서 스토리텔링 전문 큐레이터로 활동했던 김미경 박사는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팩트를 바탕으로 한 장소의 필연성과 어떤 감동을 주느냐이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스토리텔링 작가의 경우 제대로 창작을 하려면 1년 가량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부산관광컨벤션뷰로 김비태 사무처장은 "부산엔 이야기는 많아도 딱히 크게 내세울 브랜드가 약하다"면서 "등대가 갖는 의리, 신뢰, 희망 같은 상징성과 이미지를 통해 부산다움을 찾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남송우 부산문화재단 대표는 "스토리텔링은 분야가 다양하고 활용 영역이 넓지만, 아직 전문가 네트워크는 물론 작가 양성, 기획, 마케팅 어느 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면서 "숨은 광맥을 캐낸다면 부산의 문화 지형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산관광컨벤션뷰로·국제신문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