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세 통영여고 교사때 청마 만나
- 20여년 이어진 전무후무한 연모
- 만리장성 쌓을만한 5000통 연서

- 그를 지키려 연서 중 가려 책으로
- 지·정·의 갖춘 시조 문학의 대가

- 정운이 심은 모과나무와 잔디밭
- 흔적은 사라지고 주차장 변모

- '청마와 정운의 거리' 손색없는
- 부산 최고 문학콘텐츠 되살려야

묘한 긴장과 설렘이 교차했다. 그리움이 먼 파도를 타고 넘실거렸다. 애일당(愛日堂)! 참 매력적인 당호(堂號)다. 500여 년전 이현보는 안동 낙동강가에 애일당이란 별채를 지었고, 50여년 전 시조시인 이영도는 금정산 자락 부산 장전동에 애일당이란 당호를 걸었다. '하루 하루를 사랑한다' '주어진 시간을 아낀다…' 그 시간이 어찌 자기만의 것이겠는가.

이영도를 그리며 어렵사리 찾아간 애일당은 아무런 흔적조차 없었다. '해'는 사라지고 '낮달'이 교회당 종탑에 슬프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영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을 불렀다.

#연인 아닌 연인, 정운과 청마

정운 이영도 선생(왼쪽), 청마 유치환 선생

이영도(1916~76)를 부르면 어디선가 유치환(1907~67)이 불현 듯 나타난다. 정운(丁芸)과 청마(靑馬), 20세기 이 땅 최고의 시조시인과 시인. 어찌 잊겠는가. 두 사람이 20여 년간 나눈 연서가 5000여 통.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을 길고 긴 편지. 시보다 더 강렬했던 연정, 플라토닉한 사랑 그리고 돌연사….

정운이 청마를 만난 건 1945년 통영여고 교사 시절이었다. 정운은 딸 하나가 딸린 29세 청상이었다. 만주에서 귀향한 38세의 유부남 청마는 정운의 '그 높고 외롭고 정(淨)함'에 사로잡혀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지애(至愛)한 정운' '최애(最愛)한 당신'으로 시작되는 청마의 연애편지는 20여년 간 이어진다.

편지가 계속되면서 바위처럼 끄떡않던 정운도 조금씩 흔들린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온종일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운이 쓴 '무제'라는 초기 시조 작품에 그런 심경의 일단이 비친다.

1967년 2월13일 저녁 9시30분, 비보가 날아들었다.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청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때 청마의 나이가 60세. 그날도 술에 취해서 정운에게 전화로 애일당으로 찾아오겠다고 하는 것을 정운이 말렸다고 한다. 뒤에 '오라고 할 것을…'하고 정운이 한없이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여년 간 이어지던 편지가 뚝 끊겼다. 청마 없는 세상…. 홀로 된 정운의 애닯고 허허로운 마음이 그의 시조 '탑'에 투영돼 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청마 타계 후, 정운은 청마가 준 연서들 중 일부를 가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을 출간했다. 세상의 어지러운 소문으로부터 청마를 지키려 한 정운의 뜻이었다. 당시 국제신문 문화부장이었던 최계락은 편지 글을 정리하면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함에 있어 어쩌면 이토록 진실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고 술회했다. 이 책의 판매수익금은 정운시조문학상(현 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상)의 기금이 되었다. 시조시인 이호우는 정운의 친 오빠다.

#황진이가 울고 갈 출중한 작품들

주차장으로 변한 장전동 애일당 옛터.

이영도(정운)는 경북 청도 출신으로 지·정·의(知情意)를 다 갖춘 여자였다. 아는 것이 많았고 정이 두터웠으며 삶의 의지가 강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스스로 공부하고 터득해 나중엔 대학강단에도 섰다.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같은'(문학과 청년)이란 제목으로 정운 평전을 썼던 박옥금(2005년 작고) 시조시인은 정운의 인간적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드문 조선 미인'이라고 했다. 성품이 다정하여 약한 자를 위로하고 정의와 의로움을 중시했으나, 달빛처럼 차갑고 은장도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면도 있었다. 게다가 효녀였다." 부산과 서울에서 활발한 시조 활동을 할 때도 정운은 늘 음전하고 정숙한 모습을 간직해 뭇남자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그러면서도 쉬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거리를 확보했다.

정운의 시조는 출중했다. 고시조에 황진이가 있다면 현대시조에 이영도가 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초장기 그의 작품 활동은 청마와 연애한 시기와 맞물린다. 연애가 시심을 심심(深深)하게 했던가. 쉽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일단 뱉어지는 순간은 석류알처럼 붉고 감각적이었다. '그대 그림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밖에 듣는다.'(시조 '비')

정운의 시조와 수필을 읽으면 그리움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정운이 활화산처럼 작품을 뿜어내던 1950~60년대는 한국 시조문학의 절정기였다. 그 꼭지점에 정운이 있었고 그 곁에 청마가 달리고 있었다.

#애일당 후일담

정운이 부산 장전동에 둥지를 튼 것은 1956년이다. 20여년 간 남의 집 살이를 전전하다 마련한 집이라 애착이 컸다. 당호를 '애일당'이라 한 건 귀한 날들에 대한 문학적 헌사였다. 김정한, 이주홍, 고두동, 김상옥, 이근배, 김상훈, 전숙희, 임종찬 등 그 시대 내로라는 문인들이 애일당을 찾곤 했다. 정운의 첫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에는 애일당에서 벌어진 에피소드와 일상이 소담하게 담겨 있다. 이곳에서 정운은 뜰에 잔디를 심고 꽃과 나무를 운치있게 가꾸었다. 청마와의 연정이 무르익던 시기였다.

시조시인 김상옥(2004년 작고)의 회고담. "나도 애일당을 갔었지. 아무도 없는 과부집에 대문을 안으로 잠가놓고 낮잠을 자는 남자 다리가 문틈으로 보이길래 내가 '누구냐'고 호통을 쳤지. 그 사람이 청마였던기라…"(박옥금의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같은' 357쪽)

정운은 1964년 부산시의 요청으로 '부산 어린이집'을 맡아 운영했고, '달무리'라는 시민 시조모임을 이끌면서 문단의 중심에서 주옥같은 시조와 수필을 써 냈다. 애일당 시절은 그의 문학활동에 있어 전성기였다. 그러던 중 1967년 청마가 비명에 가버렸다. 그해에 정운은 12년간 살았던 애일당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다. 딸을 결혼시키는 등 서울 생활에 적응이 되어가던 1976년 3월 6일, 외출에서 돌아와 안방에서 버선을 벗던 정운은 "앗, 머리가 아파!"하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후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시조집 '언약'을 내려고 노산 이은상에게 서문을 부탁한 다음날이었다. 노산은 '사향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욱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정운의 향기는) 길이 갈 것이다'고 썼다.

#잊혀진 문화콘텐츠

기록에 남은 애일당 옛 주소는 부산 금정구 장전3동 300-22번지 6통10반 국민주택 7호다. 몇몇 문인이 찾아갔다가 허탕을 쳤다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수소문 중에 박옥위(74) 시인이 애일당 안내를 자청했다. 부산시조계 원로인 박 시인은 제19회 이영도 시조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박 시인의 기억에 기대어 찾아간 애일당은 부산대 앞 장전2지구대 맞은 편 제일교회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팻말이나 안내판 등 어떤 표지도 없었다. 주차장 관리인은 "7, 8년 전에 주차장이 됐는데 그 전에 국민주택 같은 게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박 시인은 "이영도 선생이 심었다는 모과나무와 소담한 잔디밭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라며 "없는 것도 만들어 스토리텔링 하는 시대에 애일당이란 보석같은 문학 콘텐츠를 이렇게 사장시키다니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맞다. 한창 때의 청마가 정운의 집 들창 밑에 찾아와 편지를 건네던 자리가 바로 여기다. 미모의 정운을 보려고 내로라는 문인들이 핑계를 만들어 이곳을 드나들었고 그렇게 문학이 무르익었다. 애일당 골목이야말로 '청마와 정운의 거리' '문학 사랑의 거리'라 불러 손색없는 자리가 아닌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래 금강공원에 1996년 부산문인협회가 세운 이영도 시비가 있으니 '문학의 거리'로는 제격이다.

연전에 애일당 터를 찾았다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기분이 쓸쓸해진 박 시인이 썼다는 시조 한수가 나그네의 마음을 흔든다. '흰 비둘기 내려앉던 정갈한 꽃밭에서/ 피다만 꽃들은 무엇을 기다리나/ 푸른 달 뜰을 거닐며 발소리를 죽인다'(박옥위 시조 '애일당' 중)

하루 하루를 아끼고 고고하게 사랑했던 정운과 청마, 이들의 문학혼이 깃든 애일당. 사랑을 아는 심장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애일당을 찾아야 하겠다.

chpar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