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부산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가정을 꾸렸던 부산해관장 넬슨 로바트 가족.

1876년 부산포로 개항한 이래 139년간 부산은 세계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이자 우리나라의 물산과 사람이 세계로 나가는 출구 역할을 해왔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산항은 우리나라 역사의 축약판이자 온갖 인간 군상이 나타났다 사라진 흥미로운 무대이기도 했다. 부산항 개항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과 부산항에 얽힌 사건과 사람 이야기를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이 소개한다.

- 넬슨 로바트의 편지서
- 130년 전 진달래 화사했던
- 아름다운 영도의 봄 묘사
- 개항초기 한적한 항구소개

"여기는 아무리 바쁜 시기에도 그렇게 활기가 넘치는 곳은 아니지만, 지난 2주 동안 증기선이 한 척도 들어오지 않았단다. 이 말은 집에서 보낸 편지도 빛, 생동감, 문명이 있는 바깥 세계의 소식도 접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꼬레아에서 사는 것이 참으로 무료하고 지루하다는 걸 느낄 수 있겠지. 증기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째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다림은 우리의 맘을 설레게 한단다. 그런데 너와 John 그리고 Ida의 편지를 싣고 와 우리를 기쁘게 해줄 증기선이 아직 오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증기선이 시커먼 연기를 뿜고 즐거운 뱃고동 소리를 내며 올 때까지 기운을 내고 최선을 다해 참아야겠지.

그제는 우리 모두 코레아의 절영도에 가서 한나절을 보냈단다. 진달래가 만발하게 피어 있었고 그 화려한 색으로 산 한 면을 밝게 물들이고 있었단다. 엄마는 아주 신이 나서 하양, 노랑, 파랑 세 가지 색깔의 제비꽃을 열심히 꺾었지. 수꿩은 덤불 속에서 울면서 암꿩을 유혹하고 있었단다. 나는 네 엄마를 위해 포옹하려고 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단다. 우리는 큰 소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었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단다. 왜냐하면, 한동안 나들이를 못했기 때문이지. 일본에서 겨울을 난 작은 새들이 여름을 보내기 위해 여기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즐겁게 노래하고 있지."

1885년 4월 21일, 초대 부산해관장 영국인 윌리엄 넬슨 로바트(William Nelson Lovatt, 1833~1904)가 미국에 두고 온 큰딸 넬리(Nellie) 앞으로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2주 동안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당시 부산항의 쓸쓸한 분위기가 왠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지만 절영도(지금의 영도)는 다르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새가 찾아들어 외로움을 덜어주는 아름다운 나들이 동산으로 그려져 있다. 이게 지금부터 130년 전인 부산항의 모습이다.

조선 해관에 고용된 로바트 해관장은 1883년 10월에 근무지 부산으로 와서 1년 후에 아내와 막내딸 마벨(Mabel, 당시 4살)을 초청했다. 나머지 어린 세 자녀는 취학 문제로 미국의 처가에 맡겨 두었는데 어디 부모로서 눈에 아른거리는 자녀 생각에 가슴이 저미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오륙도 수평선 너머,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며 편지를 실은 증기선이 빨리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더욱 표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 전날 어렵사리 군에 보낸 자식을 두고 동구 밖에서 집배원을 기다리는 우리네 부모님처럼 말이다.

올해로 부산항이 개항된 지 139년이 되었다. 개항은 나라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동래라는 전통적인 내륙의 양반문화가 부산포구에서 불어오는 개화바람에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부산의 관문인 오륙도 앞바다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몰고 오는 외부세계에 대한 기다림의 통로였고, 긴장과 애환이 점철된 조선의 관문이었다.

증기선에 실려서 선교사와 외래물품이 들어오고, 현해탄을 건너 대륙 침략의 수송선인 관부연락선이 드나들었는가 하면, 태극기 물결의 귀국선, 포화를 실은 전함, 새 삶을 찾아 떠나는 이민선, 원양 개척을 위해 나서는 어선, 파월장병을 실은 애환의 수송선, 오대양 육대주로 향하는 화물선, 때로는 어둠을 틈탄 밀수선과 밀항선이 사선을 넘듯 이곳을 지나쳤다.

어디 그뿐이랴. 개항 전에는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왜구의 군선을 비롯하여 대마도의 무역선인 비선(飛船)이 들락거리고, 어쩌다 불시에 커다란 이양선이라도 나타날 때면 인근 봉수대의 봉군은 긴장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더군다나 부산지역은 고려와 조선 시대 약 1000년에 걸쳐 해방(海防)에 역점을 둔 변방이었다. 이런 관계로 부산은 예전부터 변방과 관문의 역사가 병행하는 공간으로 자리하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부산항은 하루에 외항선 140여 척이 드나들고, 240여 척의 선박이 머무르는 세계 6위의 역동적인 컨테이너 허브항이다. 그 전날 꽃피던 영도는 거대한 바다 위의 도시가 되었다. 바다를 낀 도시는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앞으로 이러한 역동의 물결 속에 살아온 이 땅의 사람들 이야기 '부산, 부산항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많은 성원을 바란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