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에 부산 남구의 부산박물관 뜰에 옮겨 세워진 약조제찰비(부산시지정기념물 제17호).

- 부산진지성 서문성곽우주석
- 임란 후 변방 사수의지 담아

- 용두산 초량왜관 약조제찰비
- 밀무역 금제 등 5개항 담아

증산(甑山)과 용두산(龍頭山)은 그렇게 높지도 크지도 않으면서 마치 고을의 주산처럼 부산의 역사가 숨 쉬는 산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들 산은 각각의 이름 뒤에 공원이란 이름표까지 함께 달고 있어 더욱 시민의 발길을 이끄는지 모른다. 잘 아시다시피 동구에 있는 증산은 오늘날 부산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속설을 지닌 산(최근에는 자성대가 부산의 유래라는 설도 있다)이고, 중구의 용두산은 근대 개항의 중심축이 된 산이다.

증산 아래 해변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어 부산포라는 갯마을이 형성되었고,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용두산 쪽으로 이어져 항세를 키워왔다. 그래서 이곳에는 역사적인 유물까지 많아 오늘날 부산의 대표적인 원도심으로 부각이 되었다. 더구나 이곳 주변에 남아 있는 비석에서 우리 부산지역의 정체성이 담긴 변방과 관문의 역사를 읽을 수 있으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진지성 서문성곽우주석(釜山鎭支城 西門城郭隅柱石)에서는 변방의 역사를, 용두산의 초량왜관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에서는 관문의 역사를 말이다.

일찍이 증산 주변은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증산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이 부산진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첫 접전지가 이곳이었다. 여기서 정발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자, 그 다음 날 동래성도 비참하게 무너지면서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짓밟았다. 증산과 자성대를 손아귀에 넣은 왜군은 곧 이곳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만들면서 병참기지화를 꾀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은 이곳에 수군을 집결해 해방(海防)을 더욱 강화하였고, 특히 자성대 정상에는 경상좌수영 관하 부산첨사영을 두어 부산포를 지키는 주군으로 두었다. 그리고는 부산진지성 서문성곽우주석에 '南徼咽喉(남요인후) 西門鎖鑰(서문쇄약)'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이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으로 변방 사수의지를 새긴 징표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왜적을 경계한 당시의 시대정신을 돌에 새겼을까?

이런 분위기는 18세기 말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이양선인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Providence)호의 함장이 남긴 항해기에서도 감지된다. 부산 용당포에 닻을 내리고 8일째인 1797년 10월 20일 자 항해일기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그들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어제 보트로 답사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만약에 항 내의 위쪽 흰색 집(자성대)이 있는 곳으로 상륙하면 험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사형당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들은 더는 육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서 끝내는 영도가 육지에 붙어 있는 부산항 최초의 항박도를 그렸던 것이다.

용두산의 가치는 초량왜관에서 찾을 수 있다. 초량왜관은 지금의 용두산 자리 10만 평에 세워져 1678년부터 개항하기 전까지 200여 년에 걸쳐 조선과 일본의 무역과 외교업무를 하던 공관이다. 그리고 이곳은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해외로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을 통해 조선은 동북아 3개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 약 100년에 걸쳐 가장 화려한 무역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조선의 인삼, 일본의 은, 중국의 비단은 각 나라의 대표 무역상품이었다. 특히, 조선인삼은 만병통치약과 같아 인기가 높았으며, 때로는 대일 밀무역의 주종 품목이 되어 말썽이 많았다. 약조제찰비는 이러한 잘못된 교역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5개 항으로 된 금제조항을 한문으로 새겨 초량왜관 수문에 세운 것이다. 왜관 경계 밖으로 넘어 나온 자, 왜채(倭債)를 주고받는 자, 밀무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살벌한 관문의 이야기에 소름이 돋을 것 같다.

그러나 약조제찰비는 지금으로부터 330여 년 전 부산포에 녹아 있는 초량왜관의 이야기를 한몸에 간직한 유물이면서 교역의 역사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이젠 용두산에는 약조제찰비가 없다. 본래의 비는 훼손이 우려되어 부산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복제라도 하나 해서 본래 위치인 용두산 인근에 세운다면 어떨까? 현장감 있는 생생한 이야깃거리에 용두산이 시끌벅적거렸으면 좋겠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