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께의 부산해관 선착장. 용두산을 배경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이 일본영사관이다.

- 조선행 선교사 부산이 관문
- 태풍속 선상서 조리사 채용
- 서울 동행 후 갑신정변 터져
- 동래시장 떡장수 인생역전

요즘 광복동 거리는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빛의 축제가 한창이다. 이 광복동 입구에서 자갈치 방향으로 조금 가면 쌈지공원이 나타난다. 이 공원 한가운데 색다른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기독교선교사 이곳에 첫발을 딛다'란 표제가 붙은 가운데 좀 낯이 익은 세 사람의 외국인 얼굴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들로서 앨런, 언더우드, 아펜젤러다. 2013년 봄에 부산기독교총연합이 주관하고 부산 중구청의 협조로 세워졌다.

그러면 왜 이곳에 이들의 기념비가 세워졌을까? 1884, 1885년에 걸쳐 이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조선을 찾아올 때 첫 기착지가 부산이었다. 당시 선착장은 지금의 부산데파트가 자리한 곳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곳에 설치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가까운 쌈지공원에 세운 것이다. 이들 선교사 가운데 제일 먼저 부산에 발을 디딘 사람이 앨런이다.

의료선교사 앨런은 1884년 9월 중순 남승호(660t)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9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 기선은 우리나라가 조운과 화물운송을 위해 영국계 무역상사인 이화양행으로부터 월 2회 정도 상하이에서 나가사키, 부산, 인천 간 국제항로를 운항토록 임차한 선박이었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의 대표적인 중계무역항으로 부산을 오가는 선박이 많았다. 특히 이들 선박이 현해탄(대한해협)이라 불리는 해역을 건너올 때면 거센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폭풍을 만나면 일단 쓰시마로 피항갔다가 부산으로 건너오곤 했다.

원대한 꿈을 안고 미지의 나라 조선으로 찾아온 앨런도 현해탄을 건너오면서 나가사키와 부산 중간쯤에서 태풍을 만나 혼쭐이 났었다. '앨런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처음부터 심하게 뱃멀미를 앓았고, 작은 선박들이 태풍에 휩쓸려 유실되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남승호는 쓰시마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부산항으로 입항한 모양이다. 앨런은 남승호는 무사하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달랐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남승호는 이전과는 달리 인천으로 출항하지 않고 부산항에서 하루를 묵었다.

틈을 내서 부산에 상륙한 앨런은 일본영사관 건물을 바라보며 왜색의 도시 'FUSAN'을 거닐 수 있었다. 그리고 부산해관장 넬슨 라바트를 비롯한 외국인 해관원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앨런으로서는 두 달 전에 중국에서 출산한 아내를 홀로 두고 급히 조선으로 왔으니 아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면서 태풍까지 만나 갖은 고생과 위태로움을 느꼈으니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겠는가. 앨런은 일기에서 '부산은 이미 북로전선(北路電線)과 연결되어 있다'라는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전신국을 찾아 안부 전보라도 보냈던 것 같다. 일본은 1884년 2월에 벌써 부산까지 해저전선을 설치해 놓고 전관거류지역 내 자국민과 통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앨런의 일기'에 나오지는 않지만, 앨런이 남승호를 타고 오면서 만난 것은 태풍만이 아니었다. 한 명의 조선 청년과 조우하게 됐다. 바로 그가 우리 근대사에서 보기 드문 업적을 이룬 기장 출신의 이하영이란 인물이다. 1858년생으로 앨런과는 동갑내기인 그는 처음에 동래시장에서 찹쌀떡을 팔다가 뒤에는 일본인의 점포에 들어가 일하면서 일본어와 상술을 배웠다. 수중에 어느 정도 장사 밑천이 마련되자 1883년 거상이 되어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나흘 만에 동업하던 일본인이 밑천을 몽땅 가지고 도망치는 바람에 졸지에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상심에 젖어 1년여를 헤매다가 결국 남승호에 몸을 싣고 귀국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태풍 속 남승호 선상에서 앨런을 만날 줄이야! 여기서 앨런이 이하영을 개인 조리사로 두게 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앨런이 서울에 도착하고 석 달 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때 부상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생명을 구한 그는 곧 왕실의사와 고종의 정치고문이 됐다. 이 같은 앨런의 승승장구는 이하영의 인생길에 천군만마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찹쌀떡을 팔던 장수가 훗날 지금의 장관급인 외무와 법무대신까지 올랐으니 이를 두고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겠는가.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