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수도자로 40년 살아와
- 대를 잇는 독자 생겨 행복

- 삶에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 위로 됐으면 하고 시 썼지요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 내의 해인글방에는 늘 향기가 흐른다. 화향(花香)과 문향(文香), 그리고 인향(人香)이다. 이곳에선 철따라 꽃편지와 꽃글이 피어나고, 시와 편지, 책 이야기가 퍼지며, 위로와 나눔, 희망의 기도가 번진다. 향기를 피우는 인물은 '국민 시인' 이해인(71) 수녀.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 해인글방에서 이해인 수녀가 자신의 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한기 선임기자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이해인의 '민들레의 영토' 일부)

그렇게 노래하기를 근 반세기, 지상엔 한뼘의 '민들레 영토'가 만들어졌다. 해인 수녀는 이곳에서 방문자(사전 예약)들에게 꽃 한송이를 건네고, 포근한 미소로 책과 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가 쓴 시는 세상을 치유하고 희망을 전파하는 청아한 종소리였다.

해인 수녀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톨릭출판사) 출간 40주년을 계기로 그를 어렵사리 만났다. 그는 대장암 투병 중임에도 시종 밝은 표정을 보였고, 질문 하나 하나에 또박또박 정성껏 답변했다.


#광안리 해인글방

-해인글방이 정말 예쁘고 아늑하군요.

"수녀원의 문서선교실로 사용하던 건데, 지금은 도서관 겸 제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손님들도 여기서 만나죠. 흔히 '민들레 글방'이라 부릅니다."

-'민들레의 영토'가 나온지 40년이 됐군요. 감회가 어떠한지요?

"시인으로서의 40년도 의미 있긴 하지만, 제겐 수도자로 살아온 40년의 긴 세월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고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민들레의 영토'라고 지칭한 수도원에서 한 마음으로 살아온 시간들이 새삼 더 귀하게 여겨지고, 같이 사는 수도 공동체 가족들에게도 깊은 애정을 갖게 됩니다."

-'민들레의 영토'는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50쇄 이상을 찍었고, 각종 시구절과 관련된 교과서 등 저작권만도 10여 종에 달합니다. 이 시집은 수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종신서원을 하던 1976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그후 전국의 수많은 독자, 심지어 2대 3대에 걸쳐 함께 읽는 가족독자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가 대신 울어줄 게

성베네딕도 수녀원의 민들레 동산에서 산책 중인 이해인 수녀.

-수녀님의 시가 이토록 오래, 널리 애송되는 이유는 뭘까요?

"우선은 시어가 그리 난해하지 않고, 시의 주제가 자연 사랑 우정 일상 등 평범하면서 보편적인 것이라 그런게 아닐까요. 삶에 힘겨워 하는 많은 이들이 제 시에서 작은 위로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를 썼어요."

-평상시 어디에서 주로 시상(詩想)을 얻습니까?

"일상의 경험 기도 묵상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 좋은 책 구절, 신문기사 등에서 얻은 영감 등 매우 다양해요. 시상이 떠오르면 보통은 침방에서 종이에 쓰고 컴퓨터에 저장해 놓습니다."

-그동안 펴낸 시집이 10권, 산문집이 8권이라죠. 수녀님이 가장 아끼는 시집과 시 한편 소개해 주세요.

"아무래도 첫 시집이 가장 애착이 갑니다. '파도의 말'이란 시가 인상적이에요. '울고 싶어도 못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하고 시작되는데, 2008년 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날 적에 나도 모르게 이 시를 암송했다고 하더라고요."


#단짝 친구 박인희의 컴백

-가수 박인희(71) 씨가 35년만에 컴백한다는 소식 들어셨죠? 그분과는 오랜 친구였다면서요?

"1958년도 서울 풍문여중 1~2학년 때 동기였죠. 입학식 때 눈이 마주쳐 친구가 되었죠. 얼마전 KBS '불후의 명곡'에 나온 걸 봤는데 옛 추억이 떠올랐어요. 1981년 돌연 은퇴를 선언한 그가 미국에 간 뒤에는 만날 수가 없었죠."

-박인희 씨가 노래한 '얼굴'과 은퇴하던 해에 발표한 '젊은 날의 우리들'은 해인 수녀님과의 우정을 바탕으로 쓴 노래라고 합니다.

"그런 얘길 듣고 있어요. 오는 30일 저는 '민들레의 영토' 출간 40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박인희는 컴백 콘서트를 해요. 같은 날이라 제가 가보기는 어렵겠지만, 기회 봐서 한번 만나봐야겠어요."

#아파보니 고통이 진주

-대장암 수술까지 받으셨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한지요?

"전과 같진 않으나 일상생활하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의 걱정과 기도 속에 잘 지내고 있는 편이에요."

-지난 연말에도 부산대병원에 입원을 하셨다죠? 그때 SNS에는 위독설, 심지어 사망설까지 나돌았습니다. 많이 놀라셨죠?

"한 번은 맹장쪽에 이상이 있어서, 한 번은 대상포진이 심해서 입원을 했는데 누가 기도를 청한 내용이 와전되어 한바탕 난리가 났죠. SNS가 좋긴 하지만 검증되지 않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삽시간에 퍼뜨려 황당하게 하더군요. 정말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아파보니 고통이 진주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일단 아픔을 겪고 나니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삶에 대한 긍정과 감사의 마음도 깊어졌어요. 순간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 40여년 부산에서 살아

-수녀님은 이제 부산 사람이시죠?

"광안리 베네딕도 수녀원에 들어온 지 50년이 다 돼 가는데, 수녀원 일과 공부 때문에 바깥에 나가 있던 10여년을 제외하곤 줄곧 부산에 살았지요."

-부산과의 인연이 남다르군요.

"고향은 강원도 양구지만 부산에서 더 오래 살고 있죠. 부산 성남초등학교를 다녔고 동래여중을 나왔어요. 6·25땐 가족들이 부산에 피란을 왔구요. 광안리와 황령산은 저의 중요한 산책장소죠."

-엊그제가 세월호 참사 2주기였어요.

"아프고 슬픈 상처이자 우리의 자화상이죠. 적당주의와 무책임의 결과고요. 국가 사회 개인 모두가 더욱 정직하고 성실해져야 할 것 같아요."

-수녀님은 어떤 모습으로 남고 싶으신가요?

"글쎄요. 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 편의 시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 극적으로 만남 성사…움직이는 모습에선 '소녀 티'

■ 인터뷰 언저리

서울 풍문여중 시절. 왼쪽 두번째가 이해인 수녀, 오른쪽이 가수 박인희 씨.

이해인 수녀와의 인터뷰는 극적으로 성사됐다. 해인 수녀가 '다니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이메일 인터뷰 정도만 가능하겠다고 했다. 질문을 좀 많이 까다롭게(?) 보내면서 국제신문과의 '소원한 관계'(공식 인터뷰는 거의 처음인듯)를 슬쩍 거론했다. 1차 서면 답신과 함께 긍정적 대답이 왔다. "질문이 꽤 복잡하군요. 계기가 있으니 만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운이 좋은 줄 아세요."

성베네딕도 수녀원은 광안리 좋은강안병원 바로 뒤편에 들어서 있었다. 경비실을 지나 연수원 건물에 딸린 해인글방에 들어서자 해인 수녀가 반가운 표정으로 동백꽃 한송이와 하얀 조가비, 엽서를 선물인양 덥석 안겼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꽃 한송이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해인 수녀는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해인 수녀는 모처럼 찾아온 기자에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해인글방의 요모조모를 소개하고 독자의 편지글을 잔뜩 모아놓은 비밀창고도 열어주었다. 사진 촬영도 직접 포인트를 설정해 '어떻게 할까요'하는 식으로 적극 응했다.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는 뒷모습은 마치 '소녀' 같았다.

해인 수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차를 가져온 수녀가 귀띔했다. "우리도 물어요. (해인)수녀님 환자 맞아요? 하고요. 수녀님은 요즘도 힘들어 하십니다. 통증도 겪고 있고요. 그런데도 긍정의 힘과 작은 행복의 가치를 찾고 있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죠."

수녀원을 나오자 광안리 바다에서 한바탕 해풍이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수천 수만의 해인(海仁·이해인 수녀의 필명)이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