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선원 가축 훔치거나 구입
- '대명률' 탓 판매 주민에 엄벌
- 표류 선박엔 베풀며 돌려보내
1797년 영국군함 프로비뎐스호가 부식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불시에 용당포에 입항했을 때 이 배의 브라우턴 함장이 가장 크게 실망한 것은 황소를 구입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황소를 구입하기 위해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이곳에서는 돈도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고 그의 항해기에서 토로했다. 육식을 즐겨하는 그들에겐 황소가 단지 최고의 부식거리로 보였겠지만 한 지붕아래 대대손손 함께 살아온 조선의 정서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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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조선해변에 나타난 이양선(異樣船)은 배의 모양을 두고 명명했지만 일본은 배의 검은 색상을 본따 흑선(黑船)이라 불렀다. 사진은 개항 전 조선원정에 동원된 미 아시아함대 콜로라도호. |
불시에 이양선(異樣船)이 귀착하면 먼저 역관이나 관리가 문정을 하러 두려움 속에 배에 오른다. 이들이 상부에 올린 문정결과보고서를 보면 대개 최상층 갑판에 외양간을 만들어 놓고 돼지나 닭, 양,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냉동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로서는 직접 배에서 가축을 기르면서 양질의 고기를 수급했지만 외양간이 빌 무렵이면 이들은 무서운 해적기질을 드러냈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1840년 제주도 모슬포 앞 가파도에 영국 범선이 나타나 소 9마리를 도살해 보트에 싣고 달아났다. 이러한 약탈행위에 제대로 대처 못한 제주목사는 파직당했다. 1856년 6월 함경도 안변 학포에선 프랑스 군함 비르지니호 함장 게랭이 병사들을 풀어 소 12마리를 강제로 보트에 실어 놓고는 현장에 나타난 조선 관리에게 100 피아스터의 은화를 소 값으로 건냈다고 한다. 한 달 후 이들은 충청도 고대도에서도 수백 명의 병사가 민가를 급습해 소 18마리, 돼지 3마리, 닭 50마리를 약탈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출항 직전 은화 122원을 지방관리에게 지불했지만 한사코 받지 않아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1859년 영국의 존워드 함장이 액티온호를 몰고 부산포에 왔을 때는 달랐다. 함장 일행은 초량주민과 몰래 접촉해 부식용 닭을 구입했다. 하지만 이게 들통나는 바람에 닭을 판 주민은 관아로 끌려가 태형을 받았다. 이 정도라면 부산포에 나타난 이양선은 그런대로 점잖았다고나 할까.
오래전부터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온 조선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명나라의 기본법전인 '대명률'을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변경에서의 통행이나 통상행위가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부산과 같은 해안지역은 해금정책 하에 바다로 나가는 행위에 대해 통제가 심해 해상교통이나 무역과 어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해방강화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피항이나 표류해온 이양선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에게는 유원지의(柔遠之意) 정신을 발휘해 '먼데서 온 손님에 대해서는 베풀며 돌려보내는 것'이 조선의 공식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이양선과 몰래 내통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명률에 따라 엄벌이 주어졌다. 예를 들면 사사로이 국경 밖이나 바다로 나가 상행위를 한 경우 장 100대 형을 받아야만 했다. 어쩌다 닭 몇 마리 팔았다가 들킨 초량주민의 엉덩이엔 닭벼슬과 같은 검붉은 색상이 오래토록 물들었을 것이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