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덕도·몰운대 특히 사고 많아
- 한일호 침몰 땐 94명 숨지기도
- 낡은 배 구조변경·과적이 원인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황무지'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4월의 바다 또한 동서양에서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처녀 출항하던 세기의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14일 북대서양에서 침몰했다. 그로부터 102년이 흐른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는 세월호가 참담하게 수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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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으로 부산 대신동으로 피난 온 경기고 학생들이 1952년 통영의 한산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 이용한 창경호가 제승당 입구 선착장에 정박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
부산항에 이런 해난사고를 들먹이면 트라우마에 빠지기 쉽다. 정부 수립 후 부산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대형 여객선 사고가 찐한 아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래전 부산항 연안부두에는 남해안을 오가는 숱한 연안여객선이 있었다. 그중 부산-여수 간 남해노선이 가장 활황을 이뤘다. 야간운항도 심심찮게 많아서 항상 사고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고 다발 위험해역으로는 다대포 몰운대와 가덕도 앞 해상이었다. 이 두 곳은 낙동강 하류지역으로서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이라 안개가 자주 끼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삼각파도가 일어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대한제국 초기인 1898년 부산의 선각자 박기종이 낙동강 물류집단지인 하단에서 괴정, 부산항을 연결하는 부하철도건설계획을 수립한 것도 사실은 몰운대 앞 해상에서 운항의 어려움을 육지철로로 대체하고 싶은 발로였다.
대표적인 대형사고는 1953년 1월 9일 밤 부산-여수 간 오가던 대동상선의 창경호(146t)의 몰운대 앞 해상 침몰이었다. 이날 360여 명의 여객(정원 243명)과 양곡 450가마 등이 한순간 차가운 겨울 바닷속에 빨려들었다. 국회특별조사 결과 창경호는 20년 된 낡은 화물용 범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선박으로, 첫 번째 요인이 심한 파도였지만 과적 여객·화물도 무시를 못한다고 했다. 특히 구명장비는 도난을 우려해 회사 창고에 보관 중이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1967년 1월 14일 밤에는 가덕도 앞 해상에서 역시 부산과 여수를 오가던 여객선 한일호(140t)가 구축함 충남함(2600t)과 충돌해 94명이 생명을 잃었다. 창경호의 저주였을까. 경찰조사 결과 한일호 엔진이 앞서 침몰한 창경호에서 떼어낸 것으로 판명됐고 구명장비 또한 제대로 갖추지 않아 인명피해가 더욱 컸다. 이처럼 1950~60년대 해난사고의 원인은 낡은 배의 구조변경과 과적에서 오는 인위적인 요소가 많았다.
'증정교린지'에 의하면 1766년 대마도로 가는 외교사절인 문위행 실무사절단이 역관 현태익과 이명윤이 당상관이 되어 100여 명이 역관선 2척에 나눠 타고 부산포를 떠났다. 중간쯤에 왔을 때 큰 바람을 만나 배에 물이 새면서 파선됐다. 며칠 후 10여 명만이 부산포 주변까지 표류돼 지나가던 어부에 의해 구조됐다.
당시 동래부사 강필리로부터 사고 보고를 받은 조정은 먼저 조선공에 대해 엄형, 조선현장 파견 벼슬아치는 파직과 동시에 귀양조치를 했다. 통제사에게도 책임을 물어 호남으로 귀양을 보냈다. 처녀 출항한 선박이었기 때문에 1차로 조선기술자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그나마 바다의 외로운 원혼을 달래야 했던 것이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