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진성 인근 증산 정설이지만
- 1663년 제작된 '목장성지도'에
- 자성대 정상을 '釜山'으로 표기
부산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됐을까. 최근 기존의 '증산설'과 새롭게 대두된 '자성대설'을 두고 찬반논란이 뜨겁다. 부산의 정체성을 되찾는 차원에서 한 번쯤 시원하게 풀어야할 시대적 화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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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경의 자성대와 영가대 주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
부산이란 이름은 개항 이후 내륙인 동래부의 행정과 문화가 서서히 바닷가 초량 쪽으로 옮겨오면서 부각된 이름이다. 원래 부산은 동래부의 조용한 포구로서 지금의 동천하구를 중심으로 한 어촌이었다. 애초엔 고기를 잡아 부자가 되고 싶었던지 '부자 부(富) 자'를 써 부산포(富山浦)였다. 이후 성종 초기 가마솥에 소금을 굽는 것이 더 부자가 될 것 같았는지 '가마솥 부(釜) 자'로 바뀌면서 혼란이 야기됐다. 여기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진성을 허물고 왜성을 쌓는 바람에 더욱 혼란이 가중됐다. 그러니까 증산설을 내세우는 첫 이유가 지금 말하는 '증산이 부산'이라는 점이다. 본래 가마솥 모양의 부산에 왜성을 쌓으면서 산 정상을 깎아내리다 보니 외형이 시루모양으로 변해 '시루 증(甑)'의 증산이 됐다는 것이다. 1740년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부산이 동평현에 있으며 가마와 같은 산 아래 부산·개운포의 양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가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반면 자성대설은 조선시대 부산(富山)의 원도심은 당시 부산포가 위치했던 범천하구의 범일동 자성대공원 주변으로 일본인이 거주하던 집인 항거왜호가 증산 아래가 아닌 자성대 인근 바닷가에 있었으며, 1663년 제작된 부산지역의 '목장성지도'에도 자성대공원 능선 정상부에 묵서로 '釜山'이라고 표기돼 있음을 내세운다. 특히 동래부지에서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방호 강화를 위해 수군 이동이 있었는데도 임란 전의 수군주둔표시를 함으로써 혼란을 부추긴다고 했다. 왜란 당시 거의 파괴된 부산진성은 1607년 자성대로 옮겨지면서 대신 그 자리에 1629년 울산의 개운포만호영과 기장의 두모포만호영이 옮겨왔다는 것이다.
향토사학계에선 부산의 지명 원천과 관련, 증산(甑山)설을 거의 정설로 봐왔다. 그러나 자성대의 지리적인 위치나 형태, 역사적인 사실을 볼 때 연구검토해야 할 점이 많다.
통상 해안가나 하구 인근 섬들은 밤처럼 둥글둥글 부드럽게 생겼다. 범천하구의 자성대도 섬은 아니지만 이 같은 형상을 했을 것이다.
1895년 편찬된 영남진지에 따르면 첨사영이 자리한 자성대를 두고 여섯 차례나 '가마솥을 엎어 둔 형상'이라며 부산이름과 관련을 짓고 있다. 특히 1842년 부산첨절제사 이희봉이 자성대 위에 승가정(勝嘉亭)이란 정자를 지으며 "정자는 부산의 자성에 있다. 산이 마치 엎어 놓은 가마와 같다 하여 부산이라 한다"면서 "영가대는 물가에, 승가정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했다. 자성대는 성(城)과 관련해 생긴 이름이다. 주변이 부산포였고, 권반에 의해 만들어진 군선의 선착장도 여기였다. 우리의 통신사선이 이곳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부산포를 떠나지 않았는가. 부산의 정체성을 바닷가에서 찾아야 할 때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