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산 교통물류 중심지
- 10번 출구로 나와 15분 걷다
- 의성산 오르면 역사 한 눈에

- 조선시대 세곡창고 세웠던 곳
- 구포 상인·배 몰려 시장 발달
- 임진왜란 발발 후 왜적이 축조
- 구포왜성·성곽 등도 고스란히

- 물길과 육로 만났던 교통로
- 바쁘고 고단한 숙명 지닌 곳
- 젊은층 운집하는 명소 변신

덕천역은 도시철도 3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이다. 사통팔달의 덕천역은 서부산 교통물류 중심지로서 우뚝 섰다. 서부산에서 '목 좋고 뜨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 일대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인근 상가와 인파는 서면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서면과 다른 특징도 많다. 서면은 젊음이 넘치고, 도시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에 비해 덕천은 전통이 여전한 곳이자 부산의 역사를 진중히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남해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북이 희망교'(북구문화빙상센터~구포왜성)에서 내려다 본 덕천나돌목 일대와 낙동강.

덕천역에 내리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의성산(義城山)이다. 10번 출구로 나와 15분 정도 걸어가면 낮은 야산 위에 건립된 북구문화빙상센터(이하 빙상센터)가 보인다. 이 야산이 의성산이다. 낮아 보이지만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제법 숨이 찬다. 의성산 주변은 부산의 역사콘텐츠와 스토리를 많이 품고 있다. 감동포와 구포, 덕천동 유적, 임진왜란과 구포왜성, 의성·기찰마을 등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

■고려청자와 청동거울

의성산의 구포왜성. 지면과 거의 직각인 우리나라 성곽에 비해 왜성은 비스듬하게 쌓는다.

2002년 동아대박물관이 빙상센터 건립부지에 대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축조된 왜성(倭城)이 잔존해 있었으므로 건물을 짓기 전에 구제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를 해보니 왜성은 물론이고 삼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무덤과 유물이 쏟아졌다. 그중 놀라웠던 것은 고려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세련된 문양의 고려청자와 청동거울(銅鏡), 중국 동전과 유리구슬 등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런 작은 산 주변을 오랜 역사의 흔적들이 왜 감싸고 있는 것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 빙상센터 북쪽의 구름다리로 가보자. 다리 이름은 '북이 희망교'다. 동쪽의 만덕터널을 통과한 차들이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고 있으며, 서쪽에 펼쳐진 덕천 나들목 너머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과 시야가 좋다는 것은 지리·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산과 강, 그리고 길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있다. '목 좋고 물 좋은 곳'인 덕천에 오래 전 삼한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고려시대 사람들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덕천마을에 살다가 의성산에 묻혔을 게다.

구름다리를 사이에 두고 의성산은 '낮은 산'과 '높은 산'으로 구분된다. 높은 산 정상부에는 구포왜성(부산시 기념물 6호)이 있고, 낮은 산에는 빙상센터가 들어섰다. 1973년 남해고속도로 준공 전까지 이 산들은 한 줄기로 연결되었다. 위성사진을 보면 놀랍게도 의성산은 거북이 형상과 흡사하다. '낮은 산'이 거북이 머리, '높은 산'이 몸통처럼 생겼다. 마치 거북이가 금정산을 타고 내려와 엎드려 있다가 낙동강으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형국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해고속도로가 정확하게 거북이 목 부위를 절단하듯이 통과하고 있다. 풍수지리설 입장에서 보면 고속도로가 이곳의 지기(地氣)를 끊어놓았다는 주장을 펼칠만한 개발이었다.

구포(龜浦)의 지명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구포에서 신을 모시는 별신굿을 지냈기 때문에 '굿을 하는 갯가'의 '굿개'가 '구포'로 변했다는 설도 있지만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양산군지'는 구포에 관해 '감동포는 일명 구복포(龜伏浦)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거북이가 엎드리고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지리 형세로 본다면 구포란 지명은 구복포로부터 생겼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을 주로 감동포(甘同浦)라고 했다. 1682년 조선 정부가 세곡을 보관하고 수송하기 위한 창고인 감동창(甘同倉)을 세웠기 때문이다. 국립 세곡창고가 건립된 이후 구포에는 상인과 배들이 몰려들었으며, 상거래가 활성화되어 시장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덕천의 강변마을, 의성·기찰마을

덕천동 젊음의 거리.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풍부해 청춘들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덕천(德川)은 덕천동 시가지를 따라 흘렀으나 복개되었다. 덕천은 금정산 높은 봉우리 중 하나인 상계봉에서 발원해 만덕동과 덕천동을 가로질러 흐르다 대리천과 합류해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덕천의 천변에는 전통 마을이 여럿 조성되었는데, 의성마을과 기찰마을 등이 그것이다. 숙등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한 구역 올라가면 의성로와 기찰로가 교차하는 사거리가 있다. 이들 도로명은 의성·기찰마을에서 따왔다.

의성로는 덕천로에서 시작해 숙등 교차로를 지나 의성산 동쪽을 감아돌다 금곡대로로 흘러간다. 의성마을은 의성로 북쪽 끝의 자연마을이었다. 이곳은 '안 의성'과 '바깥 의성' 마을로 나뉜다. 의성산을 기준으로 '안 의성'은 동북쪽에, '바깥 의성'은 서남쪽에 자리잡았다. 바깥 의성마을은 기찰마을과 근접해 있었다고 한다. 의성마을은 낙동강과 덕천을 끼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전형적인 강변 마을이었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어 한 차례 홍역을 치렀고, 남해고속도로와 금곡로까지 통과해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의성마을의 명칭은 의성산에서 따왔다. 의성(義城)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신라는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구포에 성을 쌓았다. 신라의 황룡 장군과 500여 군사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이 성을 지키다 전멸하였다. 그러자 신라 정부는 이들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 성을 의성(義城)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설이다. 구포왜성을 축조한 왜적들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을 비우고 나갔고, 대신 이 성을 장악한 조선 의병들이 왜적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설이 모두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부산 백성들이 일본 침략에 맞서 싸웠다는 국난 극복의 의지를 이 성에 담아서 의로운 전설을 창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찰마을은 지금의 덕성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기찰(譏察)은 검문한다는 뜻이다. 기찰마을에 조선시대 범죄를 조사하거나 죄인을 검문하는 구법곡 기찰소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나가는 곳에 '구법곡(九法谷) 기찰', 동래에서 양산으로 가는 지점에 '십휴정(十休亭) 기찰'을 각각 두었다. 기찰소는 네 칸의 작은 건물이었다. '동래부지'에 따르면 구법곡 기찰은 네 칸이며 동래부에서 서쪽으로 20리 정도 되는 양산 땅에 있었다. 당시 구포는 양산에 속했다.

조선 정부가 구포에 기찰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을 설립해 조일 무역을 허가한 이후로 왜인들의 왕래가 활발해졌다. 그런데 잠상(潛商, 밀무역)까지 심해지자 조선 정부는 통제책을 찾아야 했다. 구포 일대는 낙동강을 통하는 물길과 만덕고개를 넘은 육로가 만나는 교통 결절점이라 밀무역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이를 차단하고자 기찰을 세웠던 것이다.

■구포왜성에서 깨닫는 침략의 역사

구름다리를 건너면 의성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산길이 나온다. 산길 아래쪽에 있는 사찰이 구룡사다. 이 절에서는 샘에 살고 있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왕 샘은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의성산이 절단된 이후로 말라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근처 당산나무까지도 고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거대한 교통로의 급속한 개설이 구포의 전통문화를 빠르게 밀어붙였다.

의성산은 고도 60m의 낮은 산이지만 덕천동 시가지를 잘 내려다 볼 수 있다. 서쪽으로는 남해로 흘러가는 낙동강 물줄기를, 동쪽으로는 금정산 산줄기를 볼 수 있다. 산과 평지, 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에 의성산은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1593년 왜장 '고바야카와'와 '다치바나'가 구포왜성을 쌓았고 5000여 왜적이 상주했다. 구포왜성은 김해 죽도 왜성을 지원하는 지성(支城)으로 축조됐다. 죽도왜성과 호포리 왜성을 연결하는 기지로써 구포왜성의 전략적 가치는 매우 컸다. 1595년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왜적들은 철수했지만 정유재란이 터진 후에 다시 구포왜성에 진입했다.

성을 보강하기 위한 2차 축조도 이뤄졌다. 이후 왜적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생포 왜성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구포왜성을 카도카이(カトカイ)성으로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왜성을 '감동포성' '감동성'으로 지칭했다. 감동포가 일본어로 바뀌면서 '카도카이'가 된 것이다.

의성산 정상부에 도착하자 왜성의 성곽이 확연히 보였다. 성곽 위에는 천수각(天守閣)이 세워졌던 터가 있다. 지면과 거의 직각으로 만든 우리나라 성곽에 비해 왜성은 비스듬하게 쌓는다. 이런 왜성의 축조방식이 튼튼하고 오래 간다. 또 왜성은 여러 성곽이 중심부를 에워싸는 구조라서 막상 성안으로 진입해도 미로에 빠진 듯 적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다.

4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성곽이 건재하다는 사실과 이에 담긴 침략의 역사에 놀랄 수밖에 없다. 빙상센터 부지를 발굴했을 때 일본의 조리용구인 스리바찌 외에 왜적들의 제품은 별로 출토되지 않았다. 수습된 기와들도 모두 조선 것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강제 동원되거나 물자를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덕천역에 내려 의성산에 오르면 구포의 지리·문화를 익히거니와 일본 침략의 역사까지 알 수 있다.

■사통발달 덕천역의 미래

덕천역 주변에는 숱한 교통로가 개설되었다. 덕천은 서부산과 서부 경남을 잇는 곳으로 강과 도로, 철도가 연결되었다. 1970년대는 남해고속도로가 뚫렸고, 덕천 나들목이 조성되었다. 의성산 남쪽 덕천교차로에는 만덕대로와 금곡대로, 백양대로 등 북구의 대동맥들이 모여 명실상부 북구 중심지로 교통체계를 갖췄다. 하지만 모라동 주거단지와 화명신도시 개발로 인해 덕천 일대는 교통혼잡이 줄지 않았다. 3호선 덕천역은 이런 교통체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교통 요충지는 사람과 물자가 몰려서 상업지로 크게 성장한다. 예로부터 덕천교차로 인근에는 상권이 크게 발달했다. 조선시대 감동포와 구포시장의 발전은 이런 교통로의 입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전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새로 태어난다. 이제 덕천역 주변에는 현대적 상권이 발전했다. 특히 만덕대로 길가를 중심으로 상권이 밀집되어 있다. 덕천역 9번, 12번 출구로 나오면 상가 빌딩과 음식점, 병원 등이 빼곡히 들어섰는데, '북구의 명동'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만하다.

또 '덕천동 젊음의 거리'에는 서면 못지 않게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풍부해 청춘들이 운집하는 명소가 되었다. 게다가 덕천역에서 숙등역까지 젊은이를 위한 지하상가가 조성됐다. 청춘들의 방문이 늘고,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고 있다. 덕천역은 단지 사통팔달의 교통로가 아니다.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현대가 부단히 만나서 소통하는 곳이다. 물길과 육로의 만남으로 출발했던 덕천은 필연적으로 바쁘고 고단한 숙명을 지녔다. 심지어 왜적들까지 눈독을 들여 구포왜성을 쌓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침략의 역사까지 품고 덕천은 내일로 나아가고 있다. 사통팔달의 요지, 덕천역에 도착할 미래가 자못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류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