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 천황산으로 소풍 가는 날
- 참석 약속한 40명 출석률 100%
- 지팡이 짚고 보행기 밀면서
- 대장암 수술 받은 황 할머니도
- 진통제 투혼 박 할머니도 왔다
- 허리·무릎이 끊어질 것 같지만
- 91세 강 할머니가 앞장선다
- 케이블카 내려 걸어오른 1100m
- 도전·성취에 대한 의지 놀라워
정상이 바로 코앞이라는 걸 잘 안다. 이제 고작 10분가량 걸었을 뿐이다. 쉽지 않을 거라 충분히 예상하고 뗀 발걸음이다. 하지만 더는 고통을 참기 어렵다. 80여 년 몸을 지탱해온 허리와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허리는 끊어질 것 같다. 다리는 쑤시고 저리다. 젊어서 안 해본 고생이 없다. 숱한 삶의 고비를 넘었다. 그런데 지금, 이까짓 산 하나 오르지 못하는 처지가 섧다. "딱 10분만 더… 10분만 더 버티자." 아무리 되뇌도 움직일 생각 않는 다리가 원망스럽다. 주저앉는다. '다시 내려갈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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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일 여름소풍에 참가한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이 경남 밀양 천황산 해발 1020m 광장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영록 기자 kiyuro@kookje.co.kr |
그러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더 잘 안다. 최고령 강재순(91) 할머니가 일어선다. "남들 다 가는데 내가 왜 못 가." 앞장서 달린다. 진짜 달린다. 주저앉았던 할머니들이 하나둘 일어선다. 강재순 할머니의 동생 강명희(81) 할머니가 먼저 용기를 낸다. "언니도 가는데 나도 가야지." 열 살 어린 동생은 언니의 뒤를 따른다.
허귀순(82) 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다시 걷는다. 허 할머니는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아예 여행에 동행하지 않으려 했다. "업고 가겠다"는 취재팀의 간곡한 설득에 마지못해 길을 나섰다. 허 할머니는 취재팀 등에 업히지도, 누구에게 부축받지도 않았다. 오로지 지팡이 하나의 도움으로 산을 올랐다.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이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낸다'. 지난번 쿨 루프(Cool Roof) 사업과 마을잔치 때의 능동적인 변화를 넘어 이번엔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의지를 보여줬다.
취재팀은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 40명과 함께 지난 5일 45인승 관광버스를 타고 여름소풍을 떠났다. 전날까지 비가 퍼부었고, 이날도 하늘은 잔뜩 흐렸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출발 시각인 오전 8시30분 한참 전부터 지팡이를 짚고, 보행기를 밀며 버스가 있는 곳에 모였다. 출석률 100%. 소풍 참가 어르신들의 평균 나이는 80세.
목적지는 천황산이 있는 경남 밀양 얼음골이다. 산에 오르는 일이 꿈만 같은 어르신들에게 그 꿈을 이뤄주려고 정한 장소다. 걸을 수는 없지만, 케이블카를 타면 해발 1020m에 오를 수 있다. '집과 마을을 벗어나기 어려운 어르신들이 높은 산에 올라 발아래 세상을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 취재팀의 기대, 바람은 딱 거기까지였다.
취재팀과 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활동가를 포함해 모두 47명이 케이블카를 탔다. 출발. 어르신들의 몸이 깎아지른 바위와 녹색의 나무 위로 둥실 뜬다. "죽은 정원순(가명·향년 84)이만 불쌍하네. 이래 좋은 세상을 놔두고…." 어르신들은 일주일 전 별세한 고(故) 정 할머니를 생각한다. 정 할머니는 취재팀을 보면 항상 입에 먹을거리를 넣어주고, 엉덩이를 툭툭 치던 정 많은 어른이었다. 집에서 불과 100여 m. 정 할머니는 경로당 가는 길에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정 할머니도 케이블카를 탔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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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르신들이 울산 울주 자수정동굴에서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
케이블카는 해발 1020m 광장에 도착했다. 어르신들이 탄성을 지른다. "보고만 있어도 자꾸 설레네." 흐린 날씨에 안개마저 자욱 꼈지만,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발아래 세상'에 가슴이 벅차다. "고맙다. 고맙다. 너희 덕분에 이런 구경도 한다." 한껏 치장하고 소풍 나온 어르신들은 얼굴뿐 아니라 마음도 소녀 같다.
자유시간. 어르신들에게 뭐든 맘대로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줬다. 취재팀의 '기대, 바람'은 이미 이뤄졌지만, 어르신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광장에서 해발 1100m 높이의 녹산대(전망대)까지 이어진 오르막길을 올랐다. 비록 나무 갑판으로 꾸며져 있지만,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이 많은 길이다. 길의 직선거리는 280m. 안내문엔 '편안한 걸음으로 10~15분 정도 올라간다'고 돼 있다. 그러나 허리, 다리, 무릎 등 온갖 관절에 질병을 달고 사는 평균 80세 어르신들에겐 천 리 길보다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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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자매' 강명희(81·왼쪽) 강재순(91) 할머니가 해발 1100m 천황산 녹산대를 등정한 후 하산하고 있다. 이들 자매는 이날 평균 나이 80세 어르신들의 '기적 같은 산행'을 이끌었다. |
'왕언니' 강재순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자매 둘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강재순, 강명희 할머니는 정상에서 손가락 하트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강재순 할머니는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말했다. "힘들더라. 땀을 철철 흘렸지. 그래도 (세상 경치) 다 보고 왔다." 강명희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내일이 없지 싶어서… 언니 보고 용기를 냈지."
최근 대장암 수술을 받아 온몸에 안 결리는 데가 없는 황원선(80) 할머니도 정상에 올랐다. 황 할머니는 소풍 간다는 말에 지난달 12일 미장원에서 2만 원을 주고 파마와 염색을 한 뒤 한 달 가까이 설레며 기다렸다.
씩씩하기로 소문난 박영수(84) 할머니도 빠지지 않았다. 박 할머니가 내려오며 취재팀에게 말했다. "언제 또 와 보겠노.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올라가야지. 그래, 올라갔다 온 게 중요하지."
병원 가는 일을 아끼고 아꼈다가 소풍 날에 맞춰 무릎에 진통제를 맞고 온 박순분(85) 할머니도 정상에 섰다. 소풍 참가 어르신 40명 중 절반 가까운 18명이 그렇게 녹산대를 '정복'했다. 녹산대까지 오르는 건 취재팀의 계획에 전혀 없는 일정이었다.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은 언제나 취재팀의 기대와 바람을 뛰어넘는다. 어르신들이 지칠 것을 우려해 돗자리 10개를 준비했지만, 하나 펴 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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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산대에 오르기 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포즈를 취한 자매. |
인솔자 중 막내인 사회복지연대 김경일 간사는 "뭉클했다.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며 눈시울마저 붉혔다.
어르신들의 허리와 무릎엔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다. 준비한 파스 20장이 순식간에 동났다. 취재팀은 급히 편의점에서 뿌리는 파스 2통을 더 샀다. 거짓말을 좀 보태, 한때 천황산은 파스 냄새로 가득했다.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은 천황산뿐 아니라 울산 자수정동굴과 암각화박물관을 소풍했다. 신우고속관광 신동웅 사장이 어르신들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45인승 버스를 후원했다. 취재팀은 어르신 40명과 인솔자 7명 전원을 여행자보험에 가입하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비상용 승용차 한 대를 따로 운행했다. 소풍 다음 날엔 어르신들의 안부를 일일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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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선(84) 할머니가 천황산을 오르는 케이블카 안에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
이곳 어르신들이 평소 마을을 벗어나는 일은 드물다. 취재팀이 지난 3월부터 이 마을에 머물며 어르신 71명(홀몸노인 40명, 동거노인 31명)을 심층 면담한 결과 54%는 마을 밖으로 외출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일과는 집에서 TV를 보는 것(73%, 중복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사회복지연대 박민성 사무처장은 "어르신들이 집과 마을을 벗어나 함께 즐긴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라며 "'이제 못 할 일이 없다'는 어르신도 있다.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의 세상이 조금 더 높고 넓어진 것 같다"고 했다.
권혁범 김영록 기자 pearl@kookje.co.kr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