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데기, 튀김, 콩나물, 떡쟁이…
- 어르신들 젊어 장사할 때
- 팔던 음식이 별명으로 굳어
- 축의금 봉투 실명이라도 쓰면
- “이게 누꼬” 해프닝 벌어져
- 그런 할머니들 옛 사진 모아
- 그려낸 꿈많던 시절 그림
- “나는 와 못났노” “똑같구만”
- 경로당에 걸어두니 시끌벅적
- 자다가 안 아프게 죽고싶다던
- 어르신들이 확 달라졌다
- “우리 아직 쓸만하지 않은가”
- 과반이 자활공동체 참가 희망
이 한 장의 그림에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의 ‘청춘’이 담겼다. 꽃다운 나이에 번데기 튀김 콩나물 테이프(트로트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팔았다) 작은떡쟁이 큰떡쟁이 대구(돼지국밥을 주메뉴로 하는 ‘대구분식’ 식당을 운영했다) 국수 두부 순대라 불렸던 이들. 이름은 잊고 부모 남편 아내 아들딸을 위해 청춘을 몽땅 바쳤다. 억척같이 살았다. 그 시절, 축의금 봉투에 ‘실수’로 진짜 이름을 쓰면 누가 돈을 낸 건지 몰라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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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들의 청춘’.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의 젊었을 적 사진을 받아 정충진(2016년 12월 ‘WHO AM I 전’ 등 개인전 9회, 2016년 10월 제5회 BFAA국제아트페어 등 단체전 130여 회) 작가가 캐리커처로 그렸다. 생활에 치여 젊은 시절 사진이 없는 일부 어르신은 최근 사진을 활용했다. 어르신들의 젊은 얼굴에다 당시 활동했던 모습을 입혔다. 그림은 정 작가가 재능 기부했다. |
모두가 제 생각에 “젊어서 나보다 고생한 사람은 없다.” 그래도 그 시절로 돌아가면 “못 할 게 없을 것 같다.” 하루하루 고되고 어둡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꿈’이란 게 있었다. 그땐 너도나도 빛나는 청춘이었다.
경로당 막내뻘인 김영희(79.가명) 할머니는 이 마을 최고 멋쟁이다. 구름이 잔뜩 낀 날에도 위아래 검정 옷을 맞춰 입고 분홍색 선글라스를 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나 얌전한 성품을 보면 영락없는 ‘소녀’다. 젊어선 이리저리 단속을 피해 다니며 길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팔았다. 수완이 좋고, 장사를 참 잘했다. “당시 공장 남자 인부 월급이 15만 원 정도였는데, 나는 노점을 하면서도 3배가량 더 벌었지.”
옆에 있던 이철순(80.가명) 할머니가 김 할머니의 장사 비결로 ‘미인계’를 꼽는다. 이 할머니는 김 할머니를 가리키며 “저 할매가 야시같이 올림머리에 한복을 입고 장사하니까 남자들이 우르르 몰렸다”고 농을 건다. 그러자 김 할머니는 “내가 한복을 입긴 언제 입었냐”며 발끈하면서도 “올림머리를 하긴 했지”라고 금방 인정한다.
한 어르신이 과거 ‘무용담’을 시작하면 다른 어르신들의 파란만장했던 청춘 이야기도 쏟아진다. 김 할머니에게 농을 던진 이 할머니는 23년간 개금3동 철길 옆에서 돼지국밥과 국수를 파는 식당을 운영했다. 장사는 꽤 잘됐다. 고생한 만큼 “돈도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장사하기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마음이 너무 여렸다. 돈 없는 공장 인부들에게 외상 밥을 주기 일쑤였다. 밥 먹으러 온 손님에게 돈도 곧잘 빌려줬다. 떼인 돈이 적잖다. 주변에선 그런 이 할머니를 ‘은행’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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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리커처의 실제 주인공인 어르신들이 그림의 모델이 된 옛 사진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
박한희(86.가명) 할머니는 취재팀에게 “내가 다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그러나 박 할머니는 원래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젊었을 적 이웃들은 박 할머니를 ‘박사’로 대접했다. 재봉틀만 있으면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귀신같은 솜씨 덕분이다. 이웃 할머니들은 젊었을 적 박 할머니의 현란했던 손놀림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언제나 막힘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때그때 기막히게 들어맞는 경험담을 풀어내는 전주영(82.가명) 할머니는 지금이나 젊었을 때나 ‘만물박사’로 통한다. 이웃 어르신들은 전 할머니의 말을 ‘100% 진실’로는 믿지 않는 눈치다. “거짓말 좀 그만 하라”고 타박하기도 한다. 그래도 전 할머니는 꿋꿋하다. “내가 없으면 경로당은 재미가 없어. 다들 멀뚱히 앉아서 내 얘기만 듣잖아. 그리고 내 말은 다 진짜야.”
말수가 적은 강평순(84.가명) 할머니는 마을 인근 ‘○○고무’에서 65세 정년까지 일하다 퇴직한 게 자랑거리다. 노점에서 떡볶이를 팔았고 키가 작은 임계순(85.가명) 할머니는 작은떡쟁이, 생떡을 팔았고 키가 큰 하선정(80.가명) 할머니는 큰떡쟁이라 불린다. 아직도 임.하 할머니의 진짜 이름을 모르는 이웃이 많다. 하 할머니는 취재팀에게 ‘귀여운’ 부탁도 한다. “떡을 지고 장사하다가 파출소 경찰관들에게 쫓기고 생고생을 했어. 이런 거 기사로 좀 써주면 안 되나.”
한기성(80.가명)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엑스트라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인민군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한 할아버지는 1400만 관객이 본 영화 ‘국제시장’에도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이 마을 할아버지들은 평생 한 가지 혹은 두세 가지 직종에서 일한 전문가들이다. 목수에서부터 도금업 운수업 건축업까지 온갖 직업의 베테랑들이 많다.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은 청춘을 얘기할 때 가장 활기차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하다. 어깨에 힘도 잔뜩 들어간다. 어르신들의 청춘을 다 소개하려면 신문 지면 32면을 다 채워도 모자란다.
취재팀은 어르신들이 ‘빛나는 청춘’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이를 통해 여생의 새로운 의지를 북돋울 방법을 고민했다. 어르신들에게 부탁해 각자 젊은 시절 가장 예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을 받았다. 그리고 부산에서 중견으로 활동하는 정충진 작가에게 맡겼다. 정 작가는 어르신들의 젊은 얼굴에다 각자 당시 삶의 궤적을 입혀 캐리커처로 그렸다. 흔쾌히 재능 기부했다. 이 그림은 지난 13일 액자에 담겨 경로당에 걸렸다.
청춘이 압축된 한 장의 그림에 어르신들이 신났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애교 있는 불만도 나온다. “저 할매는 예쁘게 그렸는데 나는 왜 이렇노.” 곧장 반격이 들어온다. “뭐라 하노. 사진이랑 똑같구먼.”
최미숙(가명.82) 할머니가 마을 최고 어른인 성말자(가명.92) 할머니에게 말한다. “형님, 이제 저것(그림)도 걸어 놨으니까 죽지 마소. 오래 사소.” 성 할머니가 대답 대신 손뼉 치며 노래를 부른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취재팀은 92세 성 할머니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지난 2월 대장암 수술을 받은 정애순(가명.80) 할머니도 큰 소리로 말을 잇는다. “안 죽어. 내가 왜 죽어.” 박차고 일어선다.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어깨춤을 춘다. 노래한다.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지난 3월. 취재팀이 이 마을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을 때 ‘자다가, 안 아프고, 자식들한테 폐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 소망이라던 어르신들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본지는 다음 주부터 그림 속 어르신들과 함께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시리즈 2부 ‘활기찬 자활공동체’를 열어간다. 1부처럼 어르신들의 전력질주를 매주 지상 중계한다. 고령화율 24.9%, 홀몸노인 비율 37.2%인 개금3동 8통, 10통의 변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노인 고독.빈곤 문제의 해법도 모색한다. 정해진 결론은 없다. 자활공동체의 성공과 실패도 장담 못 한다.
모든 건 어르신들의 의지에 달렸다. 취재팀은 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와 함께 ‘나이 많은 어르신은 의존적이고, 주는 것만 받는 시혜의 대상’이란 편견을 깨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어디까지나 자활공동체의 주체는 어르신들이다. 개금3동 8통, 10통엔 ‘사랑하기 딱 좋은’ ‘아직은 쓸 만한’ 어르신들이 평균 35년 동안 살고 있다.
취재팀은 지난 3월부터 진행한 어르신 71명(홀몸노인 40가구, 동거노인 31가구) 심층 면담에서 자활공동체 참여 의사를 미리 물었다. 어르신 중 절반인 50%는 “자활공동체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몸이 아파 참여할 수 없다는 어르신들도 대부분 “여건이 된다면 공동체 사업엔 함께하고 싶다”고 답했다.
복지법인 우리마을 김일범 팀장은 “새로운 노인 복지는 어르신들이 단순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를 이끌어갈 주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범 김영록 기자 kiyuro@kookje.co.kr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