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부산도시철도 3호선 스토리 여행 <6-2> 수영역: 수영25의용단-그릴 수 없는 노을빛 사랑까지도(하)

피의 맹세를 마친 그들의 눈빛이 횃불처럼 이글거렸다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7-07-23 20:07:21
| 본지 17면

- 어둠 속 바다로 뛰어든 끝량과 달망
- 부싯돌로 볏짚에 일으킨 관솔불을
- 군량미 가마니를 실은 왜선 선창에 던져
- 두 척의 안택선을 태우는 데 성공했다
- "자, 이제 가자. 너무 끌믄 꼬리 잡힌다"
- 아재의 재촉에도 끝량은 멈출 수 없었다

"아재!"

달망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끝량을 어느 허름한 주막의 구석방으로 이끌었다.

탁배기를 앞에 놓은 그는 끝량을 새삼스레 살폈다.

"왜장의 몸종 노릇을 한다카더마는 신관이 편한갑네. 조선천지 백성들은 굶어죽어 나가는데 얼굴이 피둥피둥한 걸 보이……"

"아재, 무슨 그런 말씸을……"

끝량은 오랜 만에 만난 아재의 비아냥이 섭섭하고 무안했다.

"누군들 그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기요. 그라는 아재는 와 나를 데리가지도 않고 혼자만 도망갔십니까."

달망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럼, 왜적의 종노릇 않고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한 일을 할 길을 내가 알리주면 그대로 따를 기가?"

"예?……예."

"좋다. 그라모 이틀 후 자시(밤 11시~새벽 1시) 첫머리에 동문 밖 큰바위(후일의 선서바위)로 살짝 나오이라. 누구에게라도 발설하모 절대로 안 된다."

끝량은 이틀 후 큰바위로 갔다. 약속대로 낮게 휘파람을 세 번 끊어 불었다.

"휙, 휙, 휘익~"

바위 뒤편 대나무 숲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달망이었다.

"왜놈들에게 뒤를 밟히지는 않았것재? 나를 따라 오이라."

바위 뒤편 대나무 숲에는 어둠 속에 사람들이 이곳저곳 웅크려 있었다. 얼핏 봐도 스물은 넘어 보였다. 달망은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끝량을 데려갔다.

"말씀 드렸던 아이입니다."

"그래? 이 아이를 믿을 수 있겠느냐?"

"예에. 나이가 아직 어리도 입이 무겁고 심성이 무던합니다."

사내의 얼굴이 횃불에 일렁거렸다. 서른다섯 쯤 돼 보이는 장년인데 수염이 탐스러웠다. 끝량은 그가 좌수영의 판옥선을 타던 군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사내는 끝량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 네가 지금 왜장의 몸종노릇을 하고 있다지?"

"……예."

"그래. 나라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때다. 장수란 자가 전함을 가라앉히고 도망을 쳤다마는 어떡하겠느냐. 우리 같은 백성들이라도 나서서 적에게 짓밟힌 강토를 되찾아야지. 네가 왜장 사령부에 박혀있다니 쓸모가 있겠구나. 왜병의 동태를 우리에게 알려다오."

"예."

그날 모인 이는 스물다섯 명이었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에서부터 수영의 군교와 이름 없는 병졸, 저잣거리의 갖바치, 주막의 감상칼자와 중노미, 그리고 끝량처럼 공사노비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선비 한 사람이 바위 앞에 단정히 꿇어앉아 품에서 꺼낸 종이를 읽었다.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있거늘 어찌 삶을 구하여 산야로 달아날 것인가. 단 한 번의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리라."

그들은 차례로 장도칼로 손가락 끝을 베어 주발에 피를 모았다. 그리고 돌려가며 한 모금씩 마셨다. 일렁거리는 횃불에 비친 스물다섯 명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수영사적공원에 있는 안용복 장군 사당.

그날부터 끝량은 이 스물다섯 결사대의 정탐 노릇을 맡았다. 왜군의 출정 정보, 왜병들의 배치 상황 등등을 끝량은 눈치코치로 알아내 달망 아재에게 전달하곤 했다. 그러면 스물다섯 결사대는 끝량의 정보에 따라 왜병을 야습했다. 끝량도 이따금 수영의 담을 뛰어넘어 야습조에 끼어들었다. 무기가 변변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환도와 활을 가진 군교 출신 서넛을 빼면 다들 낫과 쇠스랑에, 박달나무 몽둥이 따위가 고작이었다.

야초를 서던 왜병들의 뒤통수가 으깨지고 멀쩡한 군선의 바닥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왜군도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수영 앞 경비가 강화되고 포구에도 우둥불이 밤새도록 밝혀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인 간자를 저자에 풀어 이런 짓을 벌이는 자들이 누구인지 탐문도 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스물다섯 의용대원들의 활동이 위축되지는 않았다.

그들에 대한 소문은 어느새 수영을 넘어 부산포 전체로 퍼져나갔다. 누구는 그들이 임금이 보낸 특별공작대라고도 했고, 누구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보낸 결사대라고도 했다. 하늘이 내려 보낸 신장(神將)의 무리라고도 허황한 이야기를 하는 자까지 있었다. 저자를 다니며 자신들에 대한 백성들의 소문을 귓전으로 들을 때마다 끝량은 귀가 간지러웠고 왠지 가슴이 부풀었다.

그리고 오늘, 그들 스물다섯은 결성된 이후 최대의 유격작전을 벌이기로 한 참이었다. 수영포구엔 삼십 척의 대소 왜선들이 집결해 있었다. 부산포, 칠량, 웅천 등에 분산시킨 배가 오면 수백 척의 대선단을 이룬 후 부산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대회전을 펼칠 것이라 했다. 그것 역시 끝량이 왜장 스키야카 덴사부로의 군막에 붙어서 귀동냥한 정보였다.

"좋다. 왜놈의 배들을 이번 기회에 싹 불 싸질러 버리자. 우리가 여기서 열 척을 부수면, 이 수사의 함대가 적선 열 척을 침몰시키는 것과 같고, 서른 척을 부수면 그만한 공을 세우게 된다.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이 이 수사의 해전과 같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번엔 전원이 작전에 참가한다."

의용단의 모가비가 주먹을 부르쥐고 나지막이 외쳤을 때 다들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끝량도 가슴이 뛰었다. 스물다섯 의용대는 세 사람 씩 일곱 조로 나뉘어 적선에 숨어들기로 했다. 모가비를 포함해 활을 가진 나머지 네 사람은 야음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의 초병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활을 날려 엄호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이윽고 끝량과 달망은 적선의 꽁무니 쪽에 붙었다. 그리고 적선의 고물을 타 넘어갔다. 끝량은 서둘러 유지 뭉치를 풀고 간직한 부시를 꺼냈다. 탁! 하고 부싯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끝량은 부시깃을 볏짚에 대어 불을 일으킨 다음 관솔에 불을 붙였다. 곧 어둠 속에서 관솔불이 활활 타올랐다. 다음 순간 끝량은 불붙은 관솔을 왜선의 선창에 던져 넣었다. 선창에 가득 쌓인 군량미 가마니에 하나 둘 불이 옮겨 붙었고 이윽고 매캐한 연기가 선창에 가득 찼다.

"뛰어 내렷!"

달망의 외침에 끝량은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헤엄을 쳐서 다음 배로 건너갔다. 또 다른 안택선에 올랐을 때는 먼저 탔던 배가 화광에 휩싸여 있었고 배 안에 있던 왜군 졸개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고 있었다. 다른 조에서도 야습에 성공했는지 여기저기 화광이 치솟아 올랐다. 그날 달망과 끝량은 두 척의 안택선을 태우는데 성공했다.

"자, 이제 가자. 너무 오래 끌믄 꼬리가 잡힌다!"

달망 아재가 재촉했지만 끝량은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아재, 바로 저 앞에 한 척만 더 태우고 가입시더. 아니, 내 혼자 할 거니 아재는 먼저 가 있으소."

그리고는 말릴 틈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에 흔들리는 관선에 뛰어오른 끝량은 얼굴을 흘러내리는 바닷물을 흔들어 털어내면서 서둘러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불붙은 관솔을 상갑판 위에 솟은 누각에 던져 넣었다.

그때였다. 벼락이 내리쳐진 듯 날카로운 통증이 등줄기에서 허리께로 훑고 지나갔다.

"악!"

끝량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모로 자빠졌다. 허리에서 피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빛이 불빛에 어른거렸다. 하급 왜장 하나가 피 묻은 왜도를 치켜들고 있었다.

"고노 미즈네요우나 얏도(이 생쥐 같은 놈)!"

왜장이 다시 칼을 휘둘렀을 때 끝량은 다시 목 줄기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왜장은 짐승처럼 소리 지르며 화염을 피해 이물 쪽으로 뛰어갔다. 갑판에 널브러진 끝량의 눈에 그믐밤 검은 하늘이 담겼다. 쌀알 같은 별들이 어두운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 눈이 감기면서 졸음 같은 무의식이 천천히 찾아들었을 때 끝량의 귓전에 이명 같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물레야 물레야, 빙 빙 빙 돌아라. 이웃집 총각 잠 못 잔다. 휘영청 달은 밝고 물레 소리 자지는데, 한숨 쉬는 저 총각 애간장 다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