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활공동체 첫발 위한 시험재배
- 농약도 성장촉진제도 없이
- 비싼 생수까지 주며 애지중지
- 폭염 속에 재배 성공률 75%
- 햇빛 차단 못해 녹색 된 콩나물
- 김 할머니, 실패 자책했지만
- 사실은 영양소 훨씬 많은 ‘명품’
- 또다른 상품화 가능성 열어
- 그렇게 어르신들은 또 해냅니다
지난 23일 일요일 이른 아침 취재팀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황옥희(80) 할머니다. “권 서방(황 할머니가 기자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큰일 났어. 콩나물이 너무 많이 자랐어. 지금 딱 예쁜데, 조금 더 키우면 잔발이 많이 날 것 같아. 당장 뽑아야겠는데?” 취재팀이 놀라서 되묻는다. “어머니, 더워서 못 키운다더니 왜 이리 빨리 키웠어요?” 황 할머니가 멋쩍게 답한다. “글쎄 말이야. 내가 정성을 많이 쏟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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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금3동 8·10통 어르신들이 국산 콩으로 무공해 콩나물을 손수 키워 수확했다. 사진은 콩나물에 물을 주는 박영수(84) 할머니. 김영록 기자 |
한여름에 무슨 콩나물을 키우냐며, 못 한다고~ 못 한다고~, 날 선선해지면 그때 하자고 손사래 치던 어르신들이 결국 또 해냈다. 취재팀은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지난 3월 이후 이곳 어르신들이 ‘못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콩나물은 젊었을 적 어르신들이 청춘을 몽땅 바쳐 거둬 먹인 자식들 같다. 좁은 시루 안에서 대가리를 들고 물 달라고 까치발로 선 것이, 좁은 방 안에서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리고 엄마를 기다리던 자식들을 닮았다.
한편으로 콩나물은 ‘마지막 전력질주’를 펼치는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 같다. ‘콩나물시루 지나가는 물줄기 - 붙잡으려는 - 콩나물 줄기의 안간힘 / 물줄기 지나갈 때 솨아아 몸을 늘이는 - 콩나물의 시간 / … 물줄기 지나간다 / 다음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 생의 전부이듯 뿌리를 쭉 편다’(김선우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중).
다음 물줄기가 또 언제 지나갈지 몰라 생의 전부를 걸듯 뿌리를 뻗는 콩나물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며 해발 1100m 천황산 녹산대를 오르던 어르신들(본지 지난 10일 자 5면 보도 ‘다시 만난 세상’)을 닮았다.어르신들은 그렇게 자식 같은, 자신 같은 콩나물을 키웠다.
■폭염 이겨낸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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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순(83) 할머니가 키운 콩나물이 햇빛을 받아 녹색으로 자랐다. |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 8명에게 콩과 콩나물시루를 나눠준 건 폭염경보가 이어진 지난 19일이다. 콩은 우리 땅 전남 영광에서 우리 농민이 유전자 변형 없는 국산 씨앗으로 농약을 전혀 주지 않고 친환경 재배한 것을 부산생활협동조합에 부탁해 구매했다.
콩나물시루는 각 어르신의 취향에 맞춰 옹기 또는 양동이로 제공했다. 콩나물은 어르신들이 만든 반찬과 함께 ‘활기찬 자활공동체’의 초기 생산활동을 이끌 핵심 재료다.
자식을 키운 요령과 사연이 천차만별이듯 어르신들의 재배 방법도 다양하다. 이수금(85) 할머니는 상처 난 콩을 손으로 일일이 가려낸 뒤 물에 충분히 불려 남들보다 하루 늦게 옹기에 앉혔다. 옹기 바닥과 콩 위에는 짚을 깔고 덮었다.
박영수(84) 황옥희 할머니는 방구석 서늘한 곳에 시루를 놓고, 검은 비닐봉지나 그물망으로 옹기를 둘러 벽을 만들었다. 자라는 속도가 엄청 빠른 콩나물이 예쁜 모양을 유지하면서 곧게 뻗도록 하기 위해서다. 박, 황 할머니는 서로 집을 비워야 할 일이 생기면 번갈아 상대방 집 시루에 물을 주며 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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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아내는 황옥희(80·왼쪽)·황원선(80) 할머니. |
시루에 주는 물도 가지각색이다. 김옥순(83) 할머니는 “제일 좋은 물로 키워야 한다”며 비싼 생수를 사다가 수시로 시루를 듬뿍 적셨다. 또 다른 어르신들은 수돗물을 받아 몇 시간 둔 뒤 염소 등 불순물을 날려버린 물을 쓰거나 직접 떠온 지하수를 사용했다.
각 어르신의 콩나물 재배에서 공통점은 딱 하나. “약 줄 줄도 모르고, 그런 거 어디서 파는지도 모른다.” ‘누구’처럼 농약, 성장촉진제 따위 쓰지 않았다. 맑은 물과 정성으로만 키웠다. 만약 성공한다면, 일주일 안팎으로 예상했던 재배 기간은 나흘이면 충분했다. 취재팀은 사실 ‘콩이 다 녹아내린다’는 무더위를 고려해 ‘약’의 도움을 받지 않는 어르신들의 콩나물 재배가 적어도 한 번은 실패할 거로 예측했다. 한 차례 실패 후 다시 도전해 성공하는 모습이 기사 쓰기엔 오히려 더 좋다는 ‘얄팍한 계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어르신들은 취재팀보다 훨씬 ‘고단수’였다.
시범 재배라 8명의 어르신만 참여했지만, 콩나물 손질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공동의 몫이다. 이 마을 어르신들은 8통, 10통을 합쳐 35㎏에 달하는 콩나물을 경로당에 모여 함께 다듬고 나눠 먹었다. 92세 원덕희 할머니도 즐기던 화투장을 놓고 3시간가량 콩나물 손질에 동참했다.어르신들의 성취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콩나물을 다듬는 내내 여기저기서 ‘품평회’가 벌어진다. “이게 내 애고, 저게 니 애다. 우리 애 봐라. 얼마나 잘 컸노?” “그래도 임 씨(5년 전 사별한 이수금 할머니 남편의 성씨다) 할매 애가 제일 좋네.” 어느새 콩나물은 콩나물이 아니라 ‘애’가 됐다. 어르신들은 콩나물을 정말 자식처럼 소중하게 키워냈다.
■실패한 ‘초록’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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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이 콩나물을 다듬는 모습. |
취재팀은 이번 시범 재배의 성공률을 냉정하게 평가해 75%(8명 중 6명)로 잡았다. 10통 황원선(80) 할머니의 콩나물은 시루를 한때 물에 담가 둔 탓인지 다소 생기가 떨어졌다. 8통 김옥순 할머니의 콩나물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해 대가리가 녹색으로 자랐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기적의 초록 콩나물’이다. 실패라 생각한 초록 콩나물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편견을 버려야 대안이 나온다. 광합성 작용으로 키운 초록 콩나물은 일반 콩나물보다 비타민C와 아스파라긴산이 최대 4배,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는 비타민B2가 최대 25배 더 들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이런 장점을 알고, 요즘 건강을 생각하는 주부들은 집에서 직접 초록 콩나물을 키운다. 초록 콩나물만으로 음식을 하는 유명 식당도 등장했다. 김 할머니의 ‘실패’가 자활공동체에 색다른 아이디어를 선물했다.
삶아 먹고, 무쳐 먹고, 비벼 먹고, 볶아 먹고, 끓여 먹는 ‘국민 반찬’ 콩나물은 어르신들에겐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집집이 콩나물을 키워 먹었다. 방구석에 항상 시루가 있었다. 술 드신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아침마다 “이 웬수(원수) 같은 인간”이란 말을 반복하며 콩나물국을 팔팔 끓였다.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 시루에서 뽑아 저녁 밥상에 올린 콩나물무침은 소고기보다 쫄깃하고 구수했다.
다시, 어르신들이 콩나물을 키운다. 길고 건강한 줄기로 이웃을 이어 그 옛날 복작복작 어울려 살았던 공동체 복원에 도전한다. 70~90년 삶의 경험이 자산이다. 이제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이 만든 반찬과 키운 콩나물을 가지고 자활공동체의 근간이 될 협동조합 구성에도 나선다.
시범 재배 기간 ‘콩나물 반장’ 역을 맡았던 복지법인 우리마을 김영민 활동가는 “콩나물이 크는 속도만큼이나 어르신들의 성취감과 자부심도 빠르게 자라는 모습을 매일 확인했다”며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 순조롭게 마무리된 것 같다”고 말했다.
권혁범 김영록 기자 pearl@kookje.co.kr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