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합 발기인 모집하니 11명
- 평균 나이 82세 최고령 조합
- 모두가 임원돼 평등한 지위서
- 마을 공헌 활동에 힘 쓸 예정
- 임원 명부에 필요한 이력서
- 생전 처음 쓰는 빈 종이에
- 학력 키 몸무게는 중요치않다
- 살면서 체득한 경험·지혜가
- 어르신들의 이력이니까
“학교 어디까지 다녔어요?” - “난 가방끈이란 걸 메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혈액형 아세요?” - “응, 내가 혈압은 좋아. 정상이야.”
“혹시 자격증 있어요?” - “자격증 없으면 콩나물 못 키우나?”
“가족관계, 자녀가 몇 분이에요?” - “자식이 5명, 손주는 너무 많아서 세기도 어렵고. 칸이 모자라서 다 적겠나.”
“이력서에 붙이게 사진 한 장만 찍어요.” - “뭔 사진을 자꾸 찍어, 그거 뽑을라면 돈 든다.”
| |  |
| 개금3동 10통 할머니들이 협동조합에 가입하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김영록 기자 |
나이 팔십을 넘긴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이 이력서를 쓴다. 평생 한 번 써본 적 없는, 또는 열일곱 살 막노동 일을 할 때 나이를 속여서 쓴 이후 처음 작성하는 이력서다. ‘활기찬 자활공동체’의 기초가 될 협동조합 설립을 위해선 귀찮지만 거쳐야 할 절차다.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렌다.
그런데 취재팀의 어설픔이 ‘두 번 일’을 만든다. 인터넷에서 대충 내려받은 이력서가 문제다.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은 가래가 끓거나 기침이 나면 목에 파스를 붙인다. 화상을 입으면 치약을 바른다. 식당에서 뜨거운 냄비에 손을 덴 취재팀을 만나자 굳이 집까지 가서 치약을 들고 오기도 한다. 평생을 ‘지식’이나 ‘스펙’이 아니라, 숱한 삶의 고비를 넘기며 체득한 ‘지혜’와 ‘경험’으로 살아온 어르신들이다. 이런 어르신들에게 학력 자격증 혈액형 키 몸무게 따위를 묻고 있었으니, 누가 알면 기가 찰 일이다.
고용노동부의 ‘표준 이력서’를 참고해 어르신들만의 이력서를 다시 만들었다. 쓸데없는 스펙 대신 ‘나의 장점’과 ‘포부’를 적을 수 있게 했다. 어차피 어르신들의 파란만장한 이력을 한 장의 서류에 다 써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협동조합 임원 명부에 사진이 들어가야 한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추억을 남기도록 사진은 찍기로 했다.
■소녀보다 어여쁘다
“이거 신문에 나나? 그럼 한 번만 더 찍자.”
어르신들의 사진 재촬영 요청이 쏟아진다. 이수금(85) 할머니는 안경을 벗고 한 장 더 찍는다. 황옥희(80) 할머니는 어느샌가 가방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는다. 또 가느다란 붓에 빨간색 립스틱을 묻혀 입술을 곱게 칠한다. 열여덟 소녀보다 예쁘다. “영록아(취재팀의 기자 이름이다), 잘 찍어라.”
황 할머니를 부러운 듯 바라보던 이춘자(79) 할머니가 말한다. “나도 루주(립스틱) 좀 줘봐라.” 이 할머니의 입술도 앵두처럼 붉어진다. 그리고 다시 포즈를 취한다.
“나는 어제 찍었는데 머리가 엉망이었다.” 김순한(82) 할머니도 재촬영 행렬에 동참한다. 활짝 웃는다. 김 할머니의 미소는 어르신들이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돋보인다.
복지법인 우리마을 김영민 활동가가 어르신들에게 둘러싸여 협동조합의 취지와 이력서를 쓰는 이유를 알린다. “어머니들이 어울려 사실 수 있도록 회사를 하나 차릴 거예요.” 사실 그동안 반찬을 만들고, 콩나물을 키우고, 이웃과 나누며 수차례 설명하고 동의를 얻은 내용이다. 그래도 취재팀을 비롯한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공동기획팀은 틈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한창 무르익은 어르신들의 의지를 응원하기 위해서다.
드디어 이력서 작성의 마지막 단계. 협동조합 조합원이 될 어르신들의 포부를 듣는다. 평소 “한 번 해보자. 되든 안 되는 부딪혀 봐야지”라고 다짐해온 박영수(84) 할머니가 우스갯소리로 먼저 말문을 뗀다. “망하면 너거(공동기획팀)가 망하는 거고, 잘되면 우리가 잘해서 그런 거다잉.”
황옥희 할머니도 말을 보탠다. “다른 사람들 하는 만큼은 해볼게.” 취재팀이 살짝 개입한다. “회장님(황 할머니는 새마을경로당 회장님이다)이 남들 하는 만큼만 해서 되나, 훨씬 잘하실 거면서… ‘박영수 형님보다는 내가 더 잘할 거다’ 이렇게 쓸까요?” 황 할머니가 수줍게 답한다. “난 몰라, 그러든지.”
다리가 불편한 김순한 할머니도 의지를 다진다. “앉아서 하는 건 내가 다 할게. 다리가 아파서 그렇지 다른 덴 멀쩡하다.” 조용한 성격의 이수금 할머니도 말을 받는다. “난 앉아서 하는 건 못해. 서서 하는 건 괜찮아.” 이 할머니는 차분하고 말수가 적지만, 최근 콩나물 시범 재배 때 최고의 실력을 뽐냈다.
“나도 한마디 할까?” 황원선(80) 할머니가 한껏 고무된 분위기를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테니, 우리 모두 저 하늘 높이높이 번창하소서!” 황 할머니는 자진해서 협동조합의 성공을 기원하며 축하곡도 부른다. “우리 사이 좋은 사이, 잘 살 거야, 잘 살 거야, 우리 모두 잘 살 거야, 잘 사는 날이 올 거야~.”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은 이렇게 하루하루, 전력질주를 준비한다.
■어울려 살기, 속도 낸다
취재팀과 복지법인 우리마을은 지난 1일 부산 금정구 구서동 사회적기업연구원 본원을 찾아 협동조합 설립 실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부터 이틀간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발기인(조합원 자격을 갖춘 5명 이상)을 모집했다. 8통 5명, 10통 6명의 어르신이 발기인으로 모였다. 각 마을에 한 개씩의 협동조합을 세우는 게 목표다. 조합원은 발기인 외에도 8통, 10통 어르신들이 자유롭게 참여한다.
사회복지연대와 우리마을 활동가도 각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돼 회계 등의 업무를 돕는다. 모든 조합원은 임원이 되고, 평등하게 의견을 내며, 스스로 협동해서 사회·문화·경제적 욕구를 채우고, 마을 공헌 활동을 펼친다.
앞으로 정관 작성, 창립총회, 설립 신고, 등기, 사업자 등록 등의 절차를 밟는다. 이 모든 과정 역시 시리즈 보도를 통해 지상 중계한다. 협동조합의 주된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다. 외로운 어르신들이 ‘함께 살아갈 자활공동체’다. 발기인만 봐도 11명 중 9명이 홀몸노인이다. 평균 나이는 82세, 관련 통계는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도 최고령 협동조합이 될 것 같다.
사회적기업연구원에서의 교육은 큰 도움이 됐다. 교육을 담당한 김병규 협동조합팀장이 마침 개금3동에 오래 거주한 주민이라 8통, 10통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김 팀장은 격려는 물론 수많은 실패 사례를 소개하며 냉정한 조언도 했다.
김 팀장은 “어르신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주변에서 돕는 활동가의 욕구와 어르신들의 욕구 사이엔 언제나 괴리가 있다. 사업 종류에 따라 난이도도 크게 차이 난다”며 “마을에 오래 살고, 마을을 가장 잘 아는 어르신들이 주축인 만큼 지역만의 문화·역사를 살려 스토리가 있는 협동조합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력서] 이미지 크게 보기 click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
권혁범 김영록 기자 pear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