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헬싱키 할머니 4명
- 고독한 삶·자활 문제 해결 위해
- 노인 주거 협동조합 직접 설립
- 시에 부지 빌려 건물 짓고 거주
- 10~12명씩 워킹그룹 만들어
- 식사 준비 청소 정원관리 분담
- 시설 내 문제 월례회의서 결정
- 외부 간섭·도움 없이 자급자족
- 현재 7층짜리 건물서 70명 거주
- 취미·자기계발 함께하고 기부도
“야들아, 먼 길 다녀왔는데 얼른 와서 밥 먹어. 밥 다 차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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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 헬싱키의 노인 주거·생활공동체 로푸키리(LOPPUKIRI)에 입주한 어르신들이 손수 장만한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있다. 김영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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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호출이다. 지난 11일 이른 아침부터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전력질주협동조합 어르신들이 취재팀을 찾는다. 안 그래도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초콜릿 한 봉지를 사 들고 어르신들에게 가려던 참이다. 앞선 일주일 취재팀은 개금3동 8통, 10통에서 셋방살이를 한 6개월 중 처음으로 어르신들의 곁을 떠나 있었다.
일주일 만에 어르신들을 만나 또 고봉밥에 각종 나물을 쓱싹쓱싹 비벼 먹는다. 이제 전력질주협동조합 어르신들이 밥상에 함께 둘러앉는 일은 흔한 일상이 됐다. 이 밥상에 취재팀을 비롯한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공동기획팀이 숟가락을 얹는 일도 어색하지 않다.
식사가 끝나자 어르신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그래, 거기 할매 할배들은 진짜로 잘 살더나?” “자기들끼리 살아도 아무 문제 없더나?”
로푸키리(LOPPUKIRI), 취재팀이 일주일간 다녀온 핀란드 헬싱키의 노인 공동 주거·생활 협동조합이다. 영어로는 ‘The final spurt’, 우리말로는 ‘마지막 전력질주’라는 뜻이다. 지난 6월부터 보도된 이 기획 시리즈의 제목도 로푸키리에서 따왔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인정하면서도, 그 순간이 될 때까지 활기찬 삶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겠다는 의지가 ‘로푸키리’란 이름에 담겼다.
■고독한 삶, 대안이 된 ‘자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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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싱키 ‘제2 로푸키리’인 코티사타마 입주 어르신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
로푸키리 취재는 준비 과정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로푸키리에선 노인끼리 모든 걸 다 해낸다. 우선 취재팀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취재 일정 전체를 조율한 담당자가 78세 고령의 아울리 카니넨 할머니다. 아울리 할머니는 취재팀에게 로푸키리를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PPT)도 직접 만들었다. 취재팀이 로푸키리를 찾았을 땐 대형 모니터에 이 자료를 띄우고 손수 슬라이드를 넘겨 가며 로푸키리를 소개했다.
로푸키리는 개금3동 8통, 10통 전력질주협동조합 어르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적 ‘대안가족’의 형태를 이미 갖췄다. 로푸키리 입주 노인들은 10~12명 단위로 6개의 워킹 그룹(Working Group)을 구성해 활동한다. 이 그룹은 매주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식사 준비, 청소, 정원 관리 등을 한다. 절대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이곳 노인들은 워킹 그룹을 스스로 ‘작은 가족(Little Family)’이라 부른다. 로푸키리 안에서도 가장 의지하는 소규모 공동체다. 취재팀이 방문한 날에도 각 워킹 그룹은 사우나실 휴게실 정원 테라스 세탁실 등에 옹기종기 모여 ‘가족의 정’을 나눴다.
당번이 된 워킹 그룹은 회의를 통해 매일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한다. 그리고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조리실에서 음식을 만든다. 성별이나 나이에 따른 특혜도 차별도 없다. 로푸키리 입주 노인들은 “워킹 그룹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과 자활 의지, 협동을 배운다. 내부의 작은 문제와 위급한 상황도 서로 도와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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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티사타마 어르신들이 휴게실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다. |
로푸키리 노인들은 입주 전 공동생활과 워킹 그룹에 관한 교육을 받는다. 또 내부 규칙에 따르겠다는 서약서를 쓴다. ▷공동체 정신에 충실한다 ▷자신의 강점과 기술을 활용해 공동 공간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한다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다 ▷관리자나 별도 서비스가 없으므로 자급자족한다. 로푸키리의 규칙은 간단하면서도 자활공동체와 대안가족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워킹 그룹 구성원을 중심으로 로푸키리 입주민은 외부 도움 없이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한다. “어려움이 없냐”는 취재팀의 질문엔, “우리는 개개인이 젊은 시절 다양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경험과 경륜으로 따지면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다.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취재팀은 로푸키리 입주민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들의 일상을 둘러봤다. 정원 관리 당번인 아울리 할머니는 취재팀과의 인터뷰가 끝나자 잔디를 깎았다. 피트니스실에선 3명의 할머니가 운동으로 땀을 흘렸다. 휴게실에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했다. 밀린 빨래를 들고 세탁실을 찾거나 공동작업장에서 베틀을 돌리는 입주민도 있었다.
오후 1시30분부턴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됐다. 식사 시간이 오후 5시인 걸 고려하면 다소 이르다. 그러나 식사 준비는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작은 가족’이 협동하고 소통하는 과정임을 알면, 왜 식사 준비에 3시간 반이나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저녁 식사는 로푸키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이곳에선 저녁 식사를 사교 모임(Social Event)이라고 한다.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날도 막내부터 97세 할머니까지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이들은 식사하며 로푸키리의 새로운 소식을 듣고, 영양 정보를 챙기고, ‘가족’의 안부와 건강 상태를 확인한다. 또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자활 에너지를 얻는다.
아울리 할머니는 “다른 무엇보다 이웃들과 함께 밥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식도 전하고 서로의 컨디션도 점검할 수 있다”며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유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부자다. 로푸키리 입주민은 모두 나의 특별한 친구들이다. 이곳 노인들은 로푸키리를 ‘집’으로, 이웃들을 ‘가족’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할머니 4명의 꿈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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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푸키리를 최초 기획한 헬싱키 할머니 4명. 로푸키리 제공 |
핀란드는 유럽에서도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다. 일반 요양시설은 이미 자리가 꽉 찼다. 핀란드 노인은 대부분 자기 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나선 건 핀란드 노인 자신들이었다. 노인들은 스스로 나서 대안을 찾아냈다. 노인들의 주거·생활 협동조합, 로푸키를 만든 건 4명의 평범한 할머니였다. 할머니 4명은 커피를 마시던 중 “이렇게 고독하게 늙을 순 없다”고 뜻을 모았다. 할머니들은 몸집이 작고, 경험이 부족하고, 가난했지만 ‘꿈’이 있었다.
먼저 협동조합인 ‘활동적인 노인협회(Association of Active Seniors)’를 결성했다. 그리고 외로운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매일 즐겁고 활기찬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인을 위한, 노인에 의한’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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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푸키리 건물 전경. |
주위 시선은 차가웠다. “할머니들이 모여 뭘 할 수 있겠냐” 또는 “좋은 프로젝트이긴 한데,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반응이 잇따랐다. 로푸키리 입주를 계획하던 예비입주자 사이에서도 회의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일부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도중 떠났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헬싱키시를 계속해서 찾았고 협조를 구했다. 결국 기적이 일어났다. 헬싱키시가 로푸키리를 짓도록 땅을 빌려줬다. 2000년부터 구상하고 추진된 로푸키리는 드디어 2006년 완공됐다.
건물을 세우는 모든 과정도 이곳 노인들이 도맡았다. 사우나 도서관 식당 등 로푸키리의 공용 공간을 설계하고, 하다못해 가구나 포크를 고르고 탁자의 높이를 정하는 일도 전부 로푸키리 입주 노인들이 결정했다. 지금 로푸키리 7층짜리 건물엔 평균나이 70세가량의 노인 부부 10쌍(20명), 4명의 홀몸남성, 44명의 홀몸여성이 산다.
로푸키리 입주민은 워킹 그룹별로 취미·자기계발 활동도 즐긴다.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겨울엔 스키도 탄다. 책을 출간하고, 합창단을 만들어 발표회도 한다. 정기적으로 파티도 연다. 지역사회, 대학과도 꾸준히 연계한다. 양말 담요 등을 만들어 기부도 한다. 로푸키리 내 모든 활동에 대한 결정은 역시 매달 한 번씩 하는 월례회의에서 노인들 스스로 판단한다.
설립 당시 물음표투성이던 로푸키리는 헬싱키의 상징이 됐다. 헬싱키 시내 투어버스를 타고 로푸키리 인근을 지날라치면 현지인 가이드들은 까먹지 않고 로푸키리를 자랑한다. 로푸키리 사례를 계기로 핀란드 정부는 노인 정책 방향을 노인 스스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자활하는 쪽으로 맞추고 있다.
로푸키리 입주민의 자부심도 강하다. 이들은 스스로 로푸키리를 ‘고독한 노년의 대안’이라 강조한다. 입주민 실까 민키넨(75) 할머니는 개금3동 전력질주협동조합 어르신들에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읽고, 쓰고, 운동하고, 춤추고, 걷고, 자전거를 타고, 수영하고, 극장에 가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며 “노인이 자발적 주체가 돼 ‘활기찬 마지막’을 이끌 수 있다. 항상 생각은 날카롭게, 발은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헬싱키=권혁범 김영록 기자 kiyuro@kookje.co.kr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