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리즈 준비기간 합쳐 9개월
- 개금3동 8통 셋방살이 7개월
- 이웃과 단절한 채 살아가던
- 은둔 어르신들 마음의 문 활짝
- 함께 콩나물 키우고 반찬 만들고
- 평균 나이 80세로 천황산 등정
- 전력질주협동조합 직접 결성
- ‘한국형 로푸키리’ 목표 한발짝
- 민관정 협치 이끈 대안가족사업
- 부산시 내년 예산 1억 반영 확정
- 든든한 파트너 PNC도 생겨
애초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취재였다. “마을에 들어가서 살아보자”는 게 생각의 전부였다. 나중에 무엇을 시도하든, 만약 실패한다면 “실패했다”고 깨끗이 인정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사실 취재라 하기도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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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의 주인공인 부산 부산진구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이 전력질주를 응원해준 핀란드 헬싱키 로푸키리 입주 노인들(본지 지난달 25일 자 7면 보도)과 국제신문 독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다.
김영록 기자 kiyuro@kookje.co.kr |
취재팀은 이 마을에서 단 한 번도 ‘기자’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물론 기자 신분을 숨긴 적도 없다). 권 서방, 권 씨, 김 군, 영록이, 아들, 애 아빠, 아저씨, 총각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말 그대로, 마을에서 진짜 ‘살았다’.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시리즈가 준비 기간을 포함해 9개월, 취재팀이 개금3동 8통 보증금 없는 월세 17만 원짜리 방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후 7개월, 첫 기사를 보도한 후 4개월을 달려왔다. 처음 마을을 어슬렁거릴 때 찍은 사진을 보니 취재팀은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시리즈가 마무리될 즈음 반소매로 옷차림이 바뀌었고, 이제 또 긴소매와 점퍼를 꺼내 입을 때가 됐다.
☆사글세 벽보에서 싹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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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중구 보수동 한 마을에 붙은 월세 벽보.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기획의 계기가 됐다. |
올해 1월 첫 주, 국제신문 창간 70주년 ‘대안 만드는 사회로’ 기획 취재를 위해 부산 중구 보수동의 한 마을을 찾은 게 발단이 됐다. 홀몸노인 문제의 대안을 마련하고자 나선 길이었다. 당시 취재팀의 머릿속엔 ‘소통의 평상’ 등 여러 가지 그림이 있었다.
그러나 책상머리의 생각과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높고 좁은 계단을 올라 큰 벽 귀퉁이에 난 작은 구멍에 몸을 끼워 넣으니 50여 가구가 다닥다닥 붙은 마을이 형체를 드러냈다.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사람 사는 집과 빈집을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폐지를 줍던 어르신과 얘기를 나눴다. “저 집? 잘 몰라.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지.” 그들의 삶은 이웃과 철저히 단절되고 고립돼 있었다. 책상머리의 생각으론 극심한 빈곤과 고립에 신음하는 홀몸노인에게 희망을 줄 수 없었다.
취재를 포기하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수동 마을 입구 방 한 칸 허름한 문 옆에 붙어 있던 ‘월세 10만 원’ 벽보가 자꾸 눈에 밟혔다. 최미자(94·가명) 할머니는 “사람이 그리워 방을 내놨는데 몇 달째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했다.
☆함께 살며 준비한 꿈
보수동 ‘월세 10만 원’ 벽보는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의 출발점이 됐다. 시민이 운영하는 복지법인 우리마을, 사회복지연대와 손잡았다. 부산 전 지역 현황을 분석했다. 현장 답사도 병행했다. 고령화, 1인가구·홀몸노인 급증, 빈곤과 단절이 오래전부터 진행됐고 머지않은 미래 우리 사회의 보편적 문제를 이미 겪고 있는 개금3동 8통, 10통을 대상지로 정했다.
“결론을 내놓고 덤비지 말자. 살면서 답을 찾자.” 지난 3월 초 개금3동 8통에 월세방을 계약했다. 그때부터 마을의 온 집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사기꾼 아니냐”며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다음 날 다시, 그다음 날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의 어르신들’을 바깥으로 불러냈다.
하루하루 문을 열어주는 어르신이 늘었다. 함께 폐지 줍고, 밭에 물 주고, 청소하고, 고장 난 선풍기를 고쳤다. 관계 형성도 필요했다. 어르신들과 경로당에 모여 점당 10원짜리 화투를 치고, 감자·고구마를 쪄 먹고, 노래 대결도 했다.
집 대문과 함께 어르신들 마음의 문도 열렸다. 곡절 많은 인생사를 들었다. 가슴속 깊이 묻어 뒀던 얘기를 꺼내며 많은 어르신이 울었다. 어르신들이 들려준 애절한 삶의 이야기는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의 방향을 잡아줬다. 생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인정하면서도, 단 하루를 살아도 협동하며 활기차게 어울려 사는 것.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결정하고 지키는 것. 취재팀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협동조합과 대안가족센터라는 목표를 정했다.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개금3동주민센터가 공동기획팀에 합류했다.
☆신문 지면에 생중계된 꿈
어르신들이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지난 6월 19일부터 15주 연속 지면에 생중계됐다. 어르신들이 설레고, 성취감을 얻고, 때론 불안해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이를 통해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은 ‘노인은 단기간 시혜에만 의존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발적 주체가 돼 생산활동을 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다.
지상 생중계는 엄청난 도전이기도 했다. 결론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당장 내일 실패할지도 모를 프로젝트를 매주 중계한다는 건 취재팀에게 말 못 할 부담이었다.
예상보다 컸던 주변의 관심도 이따금 ‘독’이 됐다. 첫 보도 이후 마을에 각 기관과 개인, 단체, 정치권 등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마을을 찾은 인사 중 다수가 “노인의 자활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돕겠다”고 했다. 그런 말을 개금3동 8통, 10통 어르신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세상의 편견은 여전했다. 마을을 찾는 사람이 늘수록 어르신들은 혼란스러워졌다.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막는 것도 취재팀이 해야 했던 고된 일 중 하나였다.
지면에 사연이 소개된 일부 어르신을 집어 “방송에 출연시킨 후 ARS로 모금을 해주겠다”고 연락해온 방송사도 있었다. ‘단기간 시혜를 주고 빠져나가는 복지’, 취재팀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었다. 활기찬 자활공동체와 대안가족을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될 리 없다고 판단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먼나라에서 배운 꿈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의 롤 모델이 된 핀란드 헬싱키 노인 주거·생활공동체 로푸키리(LOPPUKIRI). 취재팀은 원래 김순이(84·가명) 이미숙(80·가명) 할머니와 함께 로푸키리에 가려고 했다. 앞으로 전력질주협동조합과 대안가족을 꾸려나갈 어르신들이 직접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르신들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네”라며 확신하게끔 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취재팀의 제안에 두 할머니는 설렜다. 취재팀은 가족들 허락을 꼭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두 할머니는 “간다. 무조건 간다. 누가 뭐래도 꼭 간다” 또는 “아이고 그날까지 내가 설레서 잠이나 자겠나”며 들떴다.
할머니들의 여권을 만들기로 한 날,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김 할머니가 “동생의 반대로 갈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이 할머니도 덩달아 헬싱키행을 포기했다. 결코 강요하거나 취재팀의 뜻대로 끌고 갈 수 없는 일이다. 취재팀은 대신 로푸키리에 다녀온 후 개금3동 8통, 10통을 집마다 돌며 ‘순회 보고회’를 했다. 그래도 두 할머니와 로푸키리에 동행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강재순 할머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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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소풍(본지 지난 7월 10일 자 5면 보도) 전 취재팀이 개금3동 8통 강재순(91) 할머니에게 안내문을 읽어주고 있다. |
이별은 어렵다. 취재팀은 이제 개금3동 8통, 10통 마을을 빠져나와야 한다. 어르신 누구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수차례 시도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강재순(91) 할머니에겐 인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 할머니는 지난 여름소풍 때 평균나이 80세 어르신들의 ‘기적 같은 천황산 등정’(본지 지난 7월 10일 자 5면 보도)을 이끈 주인공이다.
최근 로푸키리 ‘순회 보고회’를 겸해 강 할머니 집을 찾았다. 강 할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왔냐”며 반겼다. 로푸키리 사진이 담긴 카메라를 보여주며 그곳 어르신들의 꿈과 일상을 전했다. “우리도 언젠가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강 할머니의 대답이 걸작이다. “어떻게 우리가 당장 똑같이 따라하겠노. 차근차근 하나씩 노력해야지. 그래야 자네들(취재팀)이 내 나이가 됐을 때 (로푸키리처럼) 저렇게 살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콩나물 열심히 키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잘할 수 있다.”
강 할머니의 방엔 여름소풍 전 취재팀이 나눠준 안내문이 석 달째 소중히 보관돼 있었다. “우리 아들 한 번 안아보자.” 집을 나서는 취재팀을 강 할머니가 꼭 안아준다. 차마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
☆계속 영글어갈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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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공동기획팀이 대안가족센터로 변신할 개금3동 8통 창고 앞에서 어르신들과 함께할 것을 다짐하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
취재팀은 이제 개금3동 8통, 10통을 떠나지만 이 마을엔 대안가족센터가 생기고 사회복지연대와 우리마을이 남는다.
대안가족센터 리모델링 계획도 확정됐다. 부산신항만주식회사(PNC)가 대안가족 사업 취지에 공감해 리모델링 비용 전액을 내고 작업에도 참여한다. PNC는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 프로젝트에 함께하기로 했다. 든든한 파트너를 얻었다. 대안가족 사업의 민·관·정 협치에 더해 기업의 새로운 사회공헌도 이뤄졌다. PNC 측은 “부산신항이 동북아 물류의 허브인 것처럼 대안가족센터가 고령화 문제 해결의 허브가 되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대안가족 사업의 예산 반영도 결정됐다. 부산시와 부산시의회는 최대 5년간 시범적으로 진행될 이 사업에 내년 1년 차 예산 1억 원을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시의회 복지환경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정명희(비례대표) 의원은 “고령화가 심각한 부산에서 대안가족 사업은 의미가 크다”며 “대안가족이 개금3동 8통, 10통에서부터 정착해 부산 곳곳으로 뻗어 나가도록 민·관·정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애 마지막 전력질주’는 노인만을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아직도 “노인끼리 뭘 할 수 있겠어” “노인들은 그저 도움만 받는 대상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당신도 늙는다. 어쩔 수 없이 병든다. 많은 경우, 홀로 남는다. 당신은 그때 꺼내 들 ‘대안’이 있는가. 우리나라는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권혁범 김영록 기자 pearl@kookje.co.kr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공동 기획=사회복지연대, 복지법인 우리마을, 국민연금공단 부산지역본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후원=개금3동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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