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가 도망을 치자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늘 활기찼던 수영의 저잣거리는 허둥지둥 피란길을 떠나는 백성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적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을 무렵엔 수영은 이미 텅 비어버렸다. 곰솔이 우거졌던 신령스러운 수영은 왜군들의 사령부로 바뀌어 버렸다. 늘 늠름하게 바람에 나부끼던 좌수사의 수(帥)자기가 사라진 장대에는 붉은 원이 그려진 적장의 깃발이 대신 올라갔다’.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가 기획·편집한 ‘부산도시철도 3호선 스토리 여행’ 책자(2017년) 중 25의용단에 관한 팩션(‘그릴 수 없는 노을빛 사랑까지도’·강동수 작)의 일부 내용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영성에 7년간 주둔한 뒤 약탈과 살육이 자행됐다. 남은 수군과 성민 25명이 분연히 일어났다. 이들은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라며 싸우다 죽기를 피로써 맹세했다.
당시는 임금이 명나라로 도망가려고 했던 나라였다. 25용사는 왜선에 구멍을 내고 불을 지르는 등 수영의 지리에 밝은 점을 이용해 유격전을 펼쳤다.
훗날 1609년(광해군 원년) 동래부사 이안눌은 성민들의 청원에 따라 용사 25명의 사적을 모아 기록하고 용사들의 집마다 의용(義勇)이란 글자를 붙여 표창했다. ‘의용’은 여기서 비롯됐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25용사 후손의 부역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1853년(철종 4년) 경상좌수사 장인식은 수영공원에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했다.
좌수영성지 남문 뒤 곰솔(천연기념물 270호) 옆에 있었다가 25의용단 뒤쪽으로 옮겨진 ‘송씨 할매당’이란 산신당도 임란과 관련 있다. 임란 때 왜적에 맞서 싸운 ‘송씨 할매’를 기리는 신당이었는데, 신당이 전통 양식이 아니어서 병영의 군기(軍旗)를 모신 독신묘와 나란히 옮겨졌다. 지금의 건물은 지난해 2월 건립됐다. 왼쪽이 수영산신당, 오른쪽이 독신묘다. 오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