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공원 정문에서 우장춘로를 따라 미남교차로 방면으로 가던 길에 만나는 지하차도 왼쪽에는 성인 한 명만 지나갈 만큼 좁은 보행로가 나 있다.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서 있는 게 ‘우장춘 기념관’이다.
우장춘(1898~1959·사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육종학자다. 해방 이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채소 종자 산업을 해결하기 위해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를 꾸려 그의 귀국에 많은 이가 공을 들였다. 우장춘의 귀국은 ‘농업의 독립’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장춘은 39세에 ‘종의 합성설’로 농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당시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이런 그에겐 평생의 멍에가 있었다. 아버지 우범선이었다.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이던 우범선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고,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일본 여성(사카이 나가)과 결혼해 우장춘을 낳았는데, 결국 1903년 조선에서 보낸 자객에 살해된다. 우장춘이 다섯 살 되던 해였다.
1950년 3월 18일 부산 동래원예고교에서 열린 환영식장에서 우장춘은 약속한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
배추 무 양파 등 오늘날 식탁에 오로는 대부분 채소가 우장춘의 종자 개량에 힘입었다. 그는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자급하도록 했고, 연구기관을 세워 후학 양성에 애쓰는 등 한국 농학의 뿌리를 다졌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연구활동 중심지이던 옛 원예시험장 자리에 우장춘 기념관(1999년 10월 21일)이 들어섰으며, 미남교차로에서 금강공원 식물원에 이르는 도로는 우장춘로로 명명됐다.
오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