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봉에 죽도록 맞은 대학생 2명
- 기록은 남아 있지만 행방 묘연
- 사망자 추적 단서 부족하지만
- 허위사실로 치부해서는 안돼
- 진상규명위해 끝까지 추적해야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민을 추적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단서가 턱없이 부족하고, 사망설 자체가 와전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유치준 씨 외 사망자는 없다’는 단정적 결론을 내려서는 부마항쟁 그날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9일 국제신문이 입수한 부마항쟁 당시 ‘검찰 정보 보고’를 보면 군 탱크가 택시를 덮쳐 탑승자 4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79년 10월 22일 부산지검 검사장이 법무부 장관에게 보낸 이 문서에는 ‘유언비어 유포 상황’이라는 제목 아래 ‘탱크가 영업용 택시를 납작하게 만들어 승객 4명 현장 즉사’라고 적혀 있다. 이 문구 바로 옆에는 ‘(실제 상황)’이라고 명시돼 있다.
당시를 증언하는 목소리도 있다. 부산민주공원 직원 박병목 씨는 “중학생일 때 아버지와 함께 TV에 주파수 증폭기를 달아 일본 방송을 시청하던 중 부산시청 앞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길을 막는 택시를 깔아뭉개는 영상을 봤다”고 말했다. 경남대 이은진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합동참모본부가 만든 또 다른 유언비어 자료에는 구체적 상황과 탱크를 몬 군인, 택시에 타고 있던 사람의 이름과 부상 정도가 약도와 함께 기록돼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우선 ‘검찰 정보 보고’에 실린 내용 중 ‘(실제상황)’ 다음에는 교통사고 상황이 기술돼 있다. ‘(1979년 10월) 18일 오전 9시30분 전포동 철도고가 밑에서 택시가 일방 과실로 군 탱크와 충돌했다’는 것이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차성환 상임위원은 “‘유언비어 유포 상황’이란 제목의 본문 내용에 바로 이어 ‘(실제 상황)’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 따라서 유언비어와 다른 실제 교통사고를 설명하는 단락을 만들려고 한 줄을 띄우려다, 타이프기를 잘못 다뤄 실수가 일어난 것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NHK 등 일본 방송 6곳에 관련 영상의 유무를 묻기도 했지만, 수확이 없었다고 차 위원은 덧붙였다.
마산의 사망 추정자 2명 또한 확인이 어렵다. 경찰 내부의 ‘마산 경남대 소요 사건 1차 발생 보고서’를 입수해 경남지역 언론이 만든 자료에는 ‘死亡(사망) 추정자’라는 대목이 있다. 이 자료는 ‘변사체 발생’이란 제목으로 유치준 씨의 사망 당시 상태도 자세히 담고 있다. 여기에는 ‘(1979년 10월) 18일 하오 6시 대진백화점 앞에서 경남대 2년 이명수 군이 경찰 곤봉에 맞아 제일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행방 묘연 생사 불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공화당사 앞에서 하오 9시50분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1명이 전투경찰대원 2명에게 맞아 실신해 택시에 실려 시내 쪽으로 갔다. 신원 생사 불명’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당시 경남대를 다닌 이명수라는 시민은 자신이 시위에 참여한 적이 없고, 경찰에 맞은 적도 없다고 전했다. 다른 한 명은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처럼 여러 기록과 증언을 두고도 진상 파악이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허위 사실’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차 상임위원은 “‘곤봉에 맞은 여학생이 개구리처럼 퍼졌다’는 진술을 비롯해 사망자에 관한 목격담도 있지만, 대부분 확인되지 않았다”며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부마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계속해 추적 조사를 벌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준영 신심범 기자 met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