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잃어버려서 부대 복귀를 못 하고 있습니다. 혹시 차표 좀 끊어 주실 수 있나요?”
국제신문 신년기획‘부산 사람 실험카메라’ ⑥편에서 기자가 맡은 역할은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날 지갑을 잃어버려 차표 값을 빌리는 군인’이다. 5년 전 첫 휴가 복귀 때가 떠올랐다. 3박 4일 짧은 첫 휴가를 보내고 부대로 복귀하는 날, 차라리 어디 한 곳 부러져 복귀를 못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만큼 군인에게 휴가 복귀는 심경을 복잡하게 만드는 단어다. 그런 날 지갑까지 잃어버렸다는 건 끔찍하다. 군인이 복귀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탈영 아닌가. 제시간에 못 가 부대에 비상이 떨어지고, 성격 안 좋은 중대장이라도 만났을 땐 영창에 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계속되는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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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1일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시민 최일식(59) 씨가 도움을 요청하는 군인 연기자에게 차비 1만 원을 건네고 있다. 동영상 캡쳐 |
촬영은 부산종합버스터미널주식회사의 협조를 받아 지난달 21일 부산 금정구 노포동의 부산종합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진행됐다.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은 군부대가 많은 강원도로 가는 버스 노선이 몰려 있어 군인을 연기하기 최적의 장소다. 촬영 전 대합실을 둘러봐도 역시 군인이 많았다. 기자는 최대한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전역 마크가 박힌 기자의 군복 대신 공익 근무를 마친 지인의 군복을 빌려 입었다. 공익은 평상복을 입고 출근하기 때문에 베레모와 야전상의가 거의 새것과 다름없었다. 군화 끈을 고쳐 매고 촬영에 임했다.
“저기 제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50대 여성이 내 눈을 피해 지나갔다. 40대 후반의 여성도 “돈 없어요”라며 도망치듯 가버렸다. 60대 여성에게 “번호를 주면 꼭 돌려 드릴게요”라고 말했지만 허사였다.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 시민은 말을 거는 기자를 피해 왔던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서운한 감정이 없지 않았지만,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기자도 과거 지하철이나 학교 근처에서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피했다. 그때는 말을 거는 낯선 사람은 전부 사이비 종교단체 신자나 휴대전화 영업사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그런 사람이 돼 버렸다. 입장이 바뀌니 참 죽을 맛이었다. 처음 네 번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실패가 늘어갈수록 초조하고, 주눅이 들어 더욱 말 걸기가 어려워졌다.
다섯 번째 시도 만에 드디어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20대 남성을 만났다. 기자는 “부대 복귀를 해야 하는데 지갑과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차표를 끊어줄 수 있느냐. 계좌번호나 휴대전화 번호를 주면 반드시 갚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는 “사정은 알겠지만 나도 내 차표를 살 1만 원밖에 없다. 카드가 없어 도와주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20대 여성도 기자의 말을 들은 뒤 도울 여력이 없다고 했다. 거절의 말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낯선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고 걱정해준 것만 해도 감사했다.
■“군인이라 믿는다”
연이은 실패 끝에 첫 성공 사례는 같은 군인에게서 나왔다. 기자가 군복을 입은 군인 2명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하니 김원광(23) 씨가 “지갑을 어디에서 잃어버린 겁니까”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최유동(23) 씨가 “어디까지 가냐”고 묻더니 전화번호를 받은 후 매표소로 향했다. 홀아비 심정 과부가 안다더니 첫 성공이 군인일 줄이야. 기자는 매표소 앞에서 비로소 취재 사실을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알고 보니 김 씨와 최 씨는 육군에서 군 생활을 한 후 이날 제대해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갓 전역해선지 아직 군인의 절도가 몸에 밴 두 사람은 도움의 이유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김 씨는 “전역하는 날 좋은 일 하자는 생각이었다. 또 민간인이라면 약간 의심했을 텐데 같은 군인이라서 믿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신병 휴가 때 제때 복귀하지 못하면 얼마나 곤란해질지 아니까…”라며 웃었다. 최 씨에게 “돈을 못 돌려받을 수도 있지 않으냐”라고 물었다. 그는 “군복을 입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혹시 못 돌려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웃었다.
직장인 김종하(25) 씨도 비슷한 이유로 선뜻 나섰다. 기자의 도움 요청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쿨(?)하게 고개를 끄덕인 김 씨는 “나도 군 생활할 때 휴가 중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좋은 일 한 번 하자며 표를 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군복까지 입고 사기를 칠까 싶었다. 군인이라 더 믿었다”고 덧붙였다. “행선지가 더 먼 곳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차비가 더 많이 들기 때문에 그때는 전화번호를 받았을 것 같다”며 웃었다. 김경숙(54) 씨도 “어쩌다 지갑을 잃어버렸냐”고 물으면서 기자보다 앞장서서 매표소로 향했다. 취재 사실을 밝힌 후 도움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김 씨는 “친척이 직업 군인이라 나라 지키는 그들의 어려움을 안다.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갚지 않아도 된다”
자신감을 얻은 기자는 바쁘게 걸어가던 직장인 최일식(59)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최 씨가 기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기 길을 가기에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린 최 씨가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라며 물었고, 기자는 사정을 설명했다. 기자가 “부대 복귀를 해야 하는데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자 최 씨는 행선지와 표 가격을 묻더니 차표를 끊어주는 대신 지갑에서 현금 만 원을 꺼내주었다. 기자가 “계좌번호를 불러주시면 갚겠습니다”라고 하자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취재 사실을 밝히고 도움의 이유를 물었다. 자신은 “부산 사람이 아니라 충남 천안 사람”이라며 인터뷰를 사양하다 끝내 허락한 최 씨는 “젊은 청년이 다 잃어버렸다면서 곤란해하길래 그냥 도와줬다. 차비가 돈 만 원이라고 해서 현금을 그냥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혹시 최 씨도 군인 시절이 생각나서 도움을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군인 시절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최 씨는 “나는 면제입니다”라며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부산온 실험카메라 ⑥편은 시민의 따스함과 유쾌함으로 무사히 마무리됐다. 총 10번 시도해서 4번 성공했다. 사정상 표를 끊어주지 못했지만 당황한 이등병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시민도 2명 있었다. 시민이 내민 따스한 도움…. 5년 전과 달리 휴가 복귀가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이석교 기자 seokgyo@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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