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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 실험카메라 <7> 리어카 끄는 노인 만났을때

“밀어드릴까요” 한마디에…마음까지 가벼워졌다

  • 박호걸 기자 rafael@kookje.co.kr
  •  |   입력 : 2020-02-11 20:00:01
  •  |   본지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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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대 노인으로 분장한 기자
- 리어카 한가득 박스·고물 실어
- 가파른 경사로 오르락 내리락

- 낑낑대며 끌어도 지나치기 일쑤
- 점점 다리 힘 풀리고 숨 헐떡여
- 그때 귓가 들려온 “밀어줄까요”
- 기자 짓누르던 리어카 가벼워져

- 도와준 정의섭·강인호·김영훈 씨
- 하나같이 “당연히 도와야 할 일”

국제신문 신년기획 ‘부산 사람 실험카메라’ ⑦편에서 기자가 맡은 역할은 ‘경사로를 힘겹게 올라가는 폐지수거 노인’이다. 막막했다. 앞서 진행했던 실험카메라는 기자가 시민에게 다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능동적 형태였는데, 이번에는 리어카를 계속 끌면서 무한정 도움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 실험이었다. 촬영 당일인 지난 3일은 꽤 추웠다. 바람도 쌩쌩 불었던 터라 시민들이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차가운 리어카를 밀어줄지 걱정이 앞섰다.
   
■몸 힘들자 서운함 밀려와

지난 3일 기자는 촬영 전 노인 분장을 위해 부산 서면으로 향했다. SBS뷰티아카데미스쿨 서면점의 도움을 받아 분장했는데 30분 남짓 앉아있었더니 30년 더 늙은 얼굴이 됐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팼고, 머리에 서리가 듬성듬성 내려앉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온천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동래구의 도움을 받아 빌린 리어카에 박스와 신문을 채웠다. 무게가 더 나가도록 플라스틱 물통도 실었다. 손잡이에서 묵직한 느낌이 전해왔다. 기자가 리어카를 끌고 올라갈 길은 20m 남짓한 도로였는데 경사도가 족히 20%는 돼 보였다. 경사도 20% 이 숫자가 현실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사진을 꼭 챙겨 보기를 바란다.

촬영이 시작됐다. 지나가는 시민의 동선을 미리 살핀 뒤 타이밍을 맞춰 경사로로 발걸음을 뗐다. 소싯적 시골에서 리어카 좀 끌어봤기 때문에 요령이 있었다. 리어카 손잡이를 허리춤에 딱 대고 다리 힘으로 끌고 올라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예상과 달리 중간쯤 올라가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잠시만 방심해 무게 중심을 잃으면 뒤로 휘청하기도 했다. 20m 정도 길이의 경사로에서 마지막 3m가 가장 힘들었다. 평지로 합류되는 부분이었는데 힘도 빠진 상태에, 경사도 더 급했다.

처음 시도에서 손을 보태는 사람이 없었다. 두 번째 시도를 했다. 50대로 추정되는 여성이 오는 것을 보고 낑낑대며 리어카를 끌기 시작했다. 혹시나 했는데 여성은 리어카를 힐끔 보더니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3번째 시도에서 40대로 보이는 시민도 마찬가지였다. 세 차례 연이은 실패에 힘이 빠졌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숨이 찼고, ‘아이고’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도움을 주지 않은 시민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몸이 힘들어 서운함이 더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기자도 똑같았다.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 한 장을 주머니에서 손 빼기 귀찮아 받지 않았다. 인과응보라고 해야 할까.

   
국제신문 박호걸 기자가 노인 분장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분장 후 리어카를 끌고 있는 모습. 동영상 캡쳐
■“함께 밀어줄까요?”

기약 없는 도움을 기다리며 올랐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점차 리어카를 끄는 사이 쉬는 시간이 길어졌다. ‘몸도 힘들고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아이템을 교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밀어줄까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때 기분이란…. 추운 겨울에 따뜻한 어묵 국물 한 모금 마셨을 때 온몸으로 퍼지는 감동이랄까. 그 반가운 얼굴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었지만, 혹시 ‘분장이 티 날까’ 싶어 선두에서 리어카만 끌었다. 그 무겁던 리어카가 날개처럼 가벼워졌다. 과장이 아니다. 혼자 끌 때와 차원이 달랐다. 고관절을 짓누르던 리어카의 무게가 확 줄었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절반 정도의 무게여야 하는데, 실제로 기자는 80% 이상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분명 목소리는 60, 70대 어르신 같았는데 기자보다 힘을 더 썼던 것일까?

언덕 끄트머리를 기어코 넘어선 후 “고맙습니다”고 말하며 도와준 시민을 돌아봤다.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정의섭(68) 씨는 올라온 길이 힘에 부쳤는지 숨을 헐떡이며 “어디서 주웠는데 이리로 오냐”고 물었다.

정 씨와 아내 허미자(66) 씨에게 취재 사실을 밝히고 도움의 이유를 물었다. 허 씨는 “기자님 분장이 너무 잘 됐어요. 진짜 폐지를 줍는 노인으로 보이더라”고 농담(?)을 하며 웃더니 “당연히 나이 든 사람이나 힘든 사람은 도와줘야 합니다. 나는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정 씨 내외는 “살다 보면 어떤 곤경에 빠질지 모른다. 그래서 평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편”이라며 “기자님도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꼭 도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가던 길 돌아와서 도움도

정 씨 내외의 맑은 기운을 받아서일까. 이후 리어카를 밀어준 성공사례가 확 늘었다. 어르신 A 씨는 가던 길을 10m쯤 돌아와서 리어카를 밀어주기도 했다. A 씨는 오르막길을 스쳐 지나간 후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기자에게 “힘 주이소”라고 짧게 말한 후 리어카를 힘껏 밀었다. 기자는 오르막길을 오른 후 사정을 설명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A 씨는 인터뷰는 부끄러웠는지 극구 사양한 후 가던 길을 뛰어 갔다. ‘화끈하게 도와주지만, 인터뷰는 사양한다’는 쿨함이 느껴졌다. 기자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고맙습니다”라고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부산 시민의 따스한 배려도 감동적이었다. 직장인 강인호(50) 씨는 기자에게 “밀어드릴까요”라고 묻고는 힘을 보탰고, 김영훈(33) 씨도 “밀어드릴까요”라고 먼저 물은 후 리어카를 밀었다. 강 씨는 “혼자 너무 짐을 많이 싣고 힘들게 올라가길래 손을 조금 보탠 것뿐”이라고 말했고, 김 씨는 “서로 돕고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찾아서 이웃을 돕는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나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움을 주려고 하는 편”이라고 짧게 말한 후 자리를 떴다. 강 씨에게 “왜 도움을 줘도 되는지 먼저 물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는 “갑자기 밀면 다칠 수 있고, 혹시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해서…”라고 말했다.

총 12차례의 시도에서 4명의 시민이 도움을 줬다. 작다면 작고, 많다면 많을 수 있는 4번의 따뜻한 참견. 추운 겨울 부산 시민이 함께 밀어준 덕에 리어카에는 배려와 따스함이 가득했다. 그래, 아직 살만한 부산이다.

박호걸 기자 rafael@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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