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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9> 야생차밭으로 푸른 하동

아기 배냇향 같이 은은한 우전(雨前)차 … 진감선사 청명함이 이랬으리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29 19:34:35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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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공 초월한 선정 보여준 선사
- 옥천사 중창에도 명예 멀리해
- 그 행적들 어찌 비명에 담을까
- 치원, 의지할 것은 차 뿐이였다

- 거친 땅서 푸름 피운 야생찻잎
- 곡우 전 정성스레 따 덖은 햇차
- 글에 집중토록 정신 맑게했지만
- 대왕 승하에 서둘러 왕경 향해

■‘우전’을 만들다

   
하동군 화개면 침전마을 야생차밭에서 아낙들이 찻잎을 따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이 당에서 차나무의 씨앗을 가져와 왕명으로 이곳 지리산 자락인 하동에 처음 심었다고 전해온다. 국제신문DB
한 해의 첫물차인 우전(雨前)이 나왔다. 차는 본디 자갈밭이나 사질토양에서 자란 것을 상품(上品)으로 여기는데 산골이면 더욱 으뜸이다. 거친 땅에서 푸름을 피워 한겨울 매운바람과 눈보라에도 굳건히 그 초롱한 빛을 잃지 않으니 얼마나 대견한가. 이처럼 굳센 생명의 기운은 사람의 몸을 정화하고 정신을 맑게 깨우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화개의 야생차밭은 남녘 태양의 양기와 지리산 영기를 머금은 짙은 안개, 높이 자란 대나무의 그늘이 한데 어우러지니 천혜의 여건이다.

곡우(穀雨)무렵이면 한 해 농사의 밑천이 되는 볍씨를 담근다. 바야흐로 한 해 살림의 시작인 셈이다. 그 성스러운 곡우 5일 전에 따는 찻잎을 최고로 여기며 ‘우전’이라 한다. 시기는 지역의 기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찻잎을 따는 것을 ‘채다(採茶)’라 한다. 제다(製茶) 과정 중 가장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다. 오직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잎을 하나하나 손으로 딴다. 딴 생잎은 여러 차례 선별하여 시들거나 웃자란 잎을 가려내고, 채취시간에 따라 다른 수분의 함량을 고르게 한다. 덖기는 예전에는 돌솥을, 뒤에는 무쇠 솥을 쓴다. 이는 옹기처럼 숨을 쉬고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는 것은 일정하게 높은 온도를 내는 까닭이다.

솥이 데워지면 물을 뿌려본다. 극렬하게 구슬 모양으로 튀면 섭씨 250도에 이른 것이니 적당한 양의 생잎을 넣어 빠르게 덖는다. 잎이 익으며 증기와 향기가 피어오르고, 녹색으로 변하면 재빨리 꺼낸다.

1차로 덖은 차는 멍석에 흩뿌려 빠르게 냉각시킨다. 그러지 않으면 열기에 잎이 누렇게 변한다. 식은 잎은 두 손으로 비비거나 치대는데, 모양이 상하지 않으면서 서로 가볍게 마찰되도록 한다. 이는 찻잎 조직을 파괴하여 잘 우러나오게 하고 안팎 조직의 수분 함량을 같게 하여 발효를 막기 위함이다. 이런 덖기와 비비기를 솥의 온도를 낮춰가며 몇 차례 더 반복한다. 이는 잎을 말리는 과정이며 우전 고유의 형태인 침형(針形)을 갖게 하는 일이다. 찻잎을 쥐었을 때 손바닥을 찌르는 느낌이 있고 바스락거리면 키질로 이물질을 날리고 불완전한 찻잎을 골라낸다. 마지막으로 백탄 숯불로 끝덖음을 한다. 화개차 특유의 어린아이 배냇향 같은 은은한 가열향이 풍기면 비로소 우전차가 완성되는 것이다.

■진감선사 행적 더듬다

   
하동 차 농민이 전통 방식으로 차를 덖고 있다. 하동군 제공
과연 우전 햇차의 향은 맑고도 깊어 마음은 고요하고 정신은 흔들림 없이 하나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치원이 온 정성을 다해도 비명의 실마리는 아직 단 한 글자도 풀리지 않고 있다. 비록 자신이 당에서 제법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유가·불가·도가를 두루 섭렵하며 공부했다지만 어찌 섣불리 진감선사의 법력과 지혜와 공덕을 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왕명을 받아 피할 수 없으니 다시 전해들은 선사의 일을 경건한 마음으로 더듬는다.

민애왕께서 보위에 오르자(838년) 부처의 그윽한 자비에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려 발원을 청했다. 그러나 선사는 ‘부지런히 선정을 닦는 데 있을 뿐 발원하여 무엇하리요’ 했다. 사자(使者)가 복명하자 대왕은 부끄러워하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다. 대왕께서 선사는 색과 공을 초월하고 선정(禪定)과 지혜를 모두 원융하였다며 ‘혜소(慧昭)’를 호로 내리셨다. 또한 황룡사에 적을 편입하고 왕경으로 나오도록 사자를 연이어 보냈지만 끝내 받들지 않고 남녘의 지리산으로 향했다.

선사(禪寺)가 앉은 터 뒤로는 저녁노을이 끼는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전을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봄이면 시냇가에 온갖 꽃이 피고, 여름이면 길가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가을에는 두 산 사이 구릉에 밝은 달이 떠오르고, 겨울이면 산마루에 흰 눈이 뒤덮여 철마다 모습을 달리한다. 온갖 물상이 빛을 나누며, 여러 울림이 어울려 읊조리고, 빼어난 기암괴석이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눈 밝은 사람들이 연화장세계(불가의 화엄세계)야 속세에서 찾을 수 없다지만 ‘항아리 속 별천지’가 있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상찬했다. 홈을 판 대나무로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삼법화상이 창건한 옥천사를 중창하셨다.

법통을 헤아려보면 선사는 조계(曹溪·선종 제6조 혜능)의 현손제자(玄孫弟子)였다. 문성왕 12년(850년) 정월 초아흐렛날 새벽, ‘모든 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가게 될 것이다. 한마음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형해(形骸)를 갈무리하거나 명(銘)을 지어 걸어온 발자취를 기록하지 말라’ 하셨다. 말을 마치고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나니 세수 77세요, 법랍(法臘) 41년이었다. 실구름조차 없던 평온한 날씨가 홀연히 바람과 우레가 일고, 호랑이와 이리가 슬피 울부짖더니 삼나무와 향나무도 시들하게 변했다.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서로 소식을 보내 조상(弔喪)하고, 정과 인연의 미련을 끊지 못한 속세의 사람들은 슬픔을 머금고 울었으니 하늘과 사람이 애끓게 슬퍼했다. 영함(靈函·관)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도록 하였으니 제자 법량 등이 통곡하며 시신을 모셔 그날로 동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헌강왕, 선사의 명예 전각으로 전하게 하시다

   
(재)하동녹차연구소에서 녹차로 만든 상품 모음. 하동군 제공
비명에 담아야 할 고매한 행적이야 부지기수였다. 다만 그 포부와 깨우침의 현묘한 지혜를 어찌 이름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文)에 매여 말(辭)을 해쳐서는 안 되고, 말에 구애되어 뜻(意)을 해쳐서는 아니 된다 하지 않는가. 아아! 아무리 정신을 모아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으니 의지할 것은 차뿐이다. 다시 찻물을 우린다.

문밖에서 바쁘게 달려와 멈추는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치원은 까닭 모르게 가슴이 철렁하여 문을 열고 나가니 말고삐를 묶지도 못한 채 바삐 들어선 군사가 허리를 굽힌다. “대왕께서 승하하셨다는 전갈입니다!”

“아뿔싸! 내가 아둔하여 기어이 불충을 저지르는구나!”

선사께서 열반에 들자 당시 문성대왕께서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하셨다. 그러나 선사의 유지를 전해 듣고 부끄러워하며 거두셨다. 그 뒤 삼기(三紀·1기는 12년)를 지나 불법을 흠모하는 재가제자(在家弟子)들이 영원토록 썩지 않을 인연을 물으니 양진방, 정순일 등이 돌에 새길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대왕(헌강왕)께서 덕을 넓힌 선사의 지극함을 존경하고 우러러 ‘진감선사’라 추시(追諡)하고, 탑 이름을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 하여 전각(篆刻)으로 길이 명예를 전하도록 하셨다.

임금의 뜻은 거룩하고, 선사께서 명예를 가까이하지 않았음에도 이름이 알려진 것은 선정(禪定)으로 키운 법력의 여보(餘報) 아닌가. 그럼에도 아직 받들지 못하였으니…. 부족함의 죄가 크니 치원은 여장을 갖출 정신도 없이 왕경으로의 발길을 서두른다.

김정현·소설가/ 제자(題字) = 이희순

참고문헌 김동곤 ‘그 산에 차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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