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독재 반발 입소 거부 양영진
- 국제신문 기자로도 활동 사공술
- 고향 충북서 시위 앞장선 최종철
- 3명, 국립 5·18 민주묘역에 안장
- 부산대, 매년 추모제·장학금 등
- 열사정신 계승·재조명 등 노력
올해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는 부산대 출신 열사에 대한 재조명 열기가 뜨겁다. 이들은 1980년대 부산지역 학생운동을 이끌며,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했다. 서슬 퍼런 군홧발에 스러졌지만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계승하고자 했던 광주정신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오늘날로 연면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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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 교정에 있는 고 양영진 열사의 추모시비(오른쪽). 양 열사는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제신문DB |
19일 국제신문 취재팀은 국립 5·18 민주묘지에 부산대 출신 양영진 사공술 최종철 열사의 묘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된 양영진 열사는 1986년 부산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이듬해 문학동아리 연합체 ‘부대문학’을 결성, 학생운동과 문학운동을 이어나갔고, 군부독재에 반발해 1988년 대학생 군사 훈련의 일환인 전방 입소를 거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보복성 입영통지서를 받아 집에서 부대로 출퇴근하는 단기사병으로 입대했는데 2개월 뒤 조국 통일, 반미 자주, 군 자주화를 염원한 유서를 남긴 채 교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 열사는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사공술 최종철 열사의 묘는 운정동 신묘역에 조성돼 있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인 사공술 열사는 2011년 10월 12월에 안장됐다. 그는 1980년 경제학과 2학년 재학 시절 부산지역 학생조직책으로 활동한 혐의로 연행됐는데, 수사관 4명으로부터 나흘간 갖은 구타를 당해 허리뼈에 상처를 입었고,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사공 열사는 국제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펜의 힘으로 군부독재에 맹렬하게 항거하기도 했다.
최종철 열사는 1977년 부산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한 뒤 1979년 부산대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5·18로 촉발된 민주화 열망이 전국적으로 번지자 고향인 충북에서 시위에 앞장서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년 만에 특사로 석방됐지만 구금 과정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불과 4개월 만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국가보훈처는 2002년 7월 최 열사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공인했다.
이들이 지역적 연고가 없는 데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잠든 건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이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 때문이다. 부산대 민주동문회 신병륜 회장은 “세 열사가 민주화 운동에 나선 건 군부의 폭압적인 진압에 목숨을 잃은 광주 시민 때문이다. 광주가 고향은 아니지만 세 열사 모두 죽어서라도 광주 시민을 위로하고자 망월동에 묻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 8월 부산대는 민주동문회의 제안을 수용해 양영진 열사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올해 4월에는 최종철 열사에게도 명예졸업장을 전했다. 민주동문회 신병륜 회장은 “부마항쟁 즈음인 매년 10월 교내에서 양 열사를 비롯한 여러 선배를 기리는 추모제를 지낸다. 재학생에게는 열사들을 기억해달라는 의미로 매년 장학금도 전달한다”며 “민주동문회는 학교 측과 꾸준히 협력해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열사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임동우 기자 guardia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