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 이어 전국서 두 번째 판결
6·25전쟁 때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불법 체포·감금당한 뒤 사형당한 희생자 2명이 전국적으로는 경남 마산에 이어 두 번째,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재심을 통해 7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
| 지난 29일 보도연맹사건 희생자인 아버지와 형의 재심에서 각각 무죄 판결을 받은 박영재(왼쪽) 씨와 정국룡 씨가 부산법원종합청사 앞에 섰다. 박정민 기자 |
부산지법 형사5부(권기철 부장판사)와 형사6부(최진곤 부장판사)는 지난 29일 열린 국방경비법 위반(이적행위)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1950년 9월 8일 사형당한 부산지역 보도연맹원 박태구(당시 28세) 씨와 정동룡(당시 22세) 씨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고 31일 밝혔다.
재판부는 “재심 대상 사건의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아 지금 단계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료를 기초로 판단해야 하는데 (당시) 판결문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며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이미 사망한 이들의 재심은 아들인 박영재(70) 씨와 동생인 정국룡(87) 씨가 대신 청구했다. 판결문과 유족에 따르면 박 씨는 1947~1948년 이적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진 후 ‘보도연맹원은 부산 공설운동장에 집결하라’는 소집을 받고 나가서 영장 없이 연행돼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정 씨도 1948년 이적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1950년 7·8월께 군특무대에 의해 영장 없이 연행돼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남한 내에 잠복한 좌익 세력을 찾아내고 포섭한다는 목적으로 1949년 창립한 관변단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동조할 수 있다며 이들을 불법으로 체포·감금·고문·학살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50년 7~9월 부산형무소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가 최소 1500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들은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해운대구 장산골짜기에서 집단 총살당하거나 오륙도 해상에서 수장됐다. 이 중 148명만 신원이 확인됐는데, 박 씨와 정 씨가 이들 중 두 명이다. 과거사위원회 조사 결과가 나온 뒤 두 망자의 유족은 2013년 5월 부산지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2016년 1월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재심 개시를 반대했던 검찰은 이달 재심 결심공판에서 두 사람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박영재 씨는 “연좌제 때문에 평생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닐 수 없었고, 감시받고 살았다. 아들과 손자라도 좌익세력 가족이라는 딱지를 뗀다고 생각하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다.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정동룡 씨는 “형이 잡혀가고 두세 달 뒤 면회가니 ‘장소이동’됐다고 하더라. 이후 형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막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장남을 그리워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셨다. 형의 헛묘에 판결문을 들고 가 무죄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했다.
이들의 법률 대리인으로 앞서 지난 2월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6명의 재심도 무죄로 이끈 이명춘 변호사는 “국방경비법이 어떻게 인권을 유린했는지 이번 재판을 통해 드러났다. 향후 국가 차원에서 국방경비법으로 인한 피해 조사를 제대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