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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0> 옥빛 바다 펼쳐지는 합포만

의안(현 창원시) 백성 어촌의 삶 풍족했지만 배움 갈망…치원에 가르침 청하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6-14 19:16:37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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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 남녘 끝자락 해운포 출발
- 남쪽 맑고 푸른 옥빛 바다 지나
- 의안군에 이른 치원·만호 부녀

- 바다·산 인접해 물산 풍부한 곳
- 관직 얻지 못한 지식인·평민들
- 바른 길 배우고자 하는 마음 커

- 평등 외친 치원 방문에 기뻐하며
- 스승되어 눈·마음 밝혀달라 읍소

- 직접 거처까지 마련해준 백성들
- 학문에 대한 그 의지 외면 못해
- 치원, 이곳서 후학 기르겠다 결심
   
바다는 어민의 대지(大地)이고 만(灣)은 담장과 대문이 된다. 창원시 합포만은 옛날 골포에서 합포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바뀐 이름이다. 마창대교가 합포만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 돝섬이고, 그 뒤 봉우리가 마산의 진산 무학산이다. 우측 조명이 밝은 곳은 귀산동 카페거리이다. 창원시 제공
■최치원, 의안군에 발을 딛다

맑다, 푸르다, 눈부시다, 옥빛이다!

당나라를 들어가고, 돌아오며 건너던 그 탁한 바다가 아니다. 신라 땅 동쪽, 그 푸른 바다의 남색(藍色)이려니 했는데 또 다르다.

   
옥빛이 더해진 남색인가. 동해 남녘 끝자락인 해운포에서 배를 띄우자 이내 뭍에서 가까운 제법 큰 섬(영도)을 만나고, 바다와 합류하는 황산강(옛 낙동강) 하구를 지나니 거기서부터는 의안군(義安郡·현 창원시)이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끝 모르게 펼쳐진, 그래서 문득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동쪽의 망망대해. 그 남색의 끝은 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남해는 다르다. 너른 바다가 외로울까 하늘이 수(繡)라도 놓은 양 그림처럼 펼쳐진 크고 작은 섬들.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도 있고 얼마나 가야 닿을까 아지랑이처럼 아득한 멀리에도 있다. 어쩌면 남쪽 바다 쪽빛은 그렇게 서로에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정(情)이 담겨 옥빛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 바다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처럼 정이 가득하지 않을까 치원은 생각한다.

뱃머리를 뭍을 향해 돌린다. 바라보니 한 눈에 큰 만(灣)임을 알 수 있다. 바다는 고요하면 나른하지만 거칠어지면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다. 오직 만이라야만 목숨이라도 연명해 바람과 파도가 잦기를 기다릴 수 있다. 그래서 어부에게 만은 또 다른 대지이다.

포구가 가까워지자 만호는 돛을 내리며 치원을 돌아본다. “합포만(마산만)입니다. 근동에서 가장 큰 만이지요. 덕분에 일찍부터 어업이 왕성하여 한때는 해상왕국이라 불린 나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합포의 옛 이름은 골포(骨浦)다. 삼한시대 변한지역에서 이름을 떨쳤던 포상팔국(浦上八國) 중 하나인 골포국의 터전으로 해상왕국의 기반이 되었지만 신라 통일 후 35대 경덕왕에 이르러 합포로 개칭했다.

만호가 미리 연통을 넣어두었던지 배가 포구에 닿자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굽혀 치원에게 예를 표한다. 걸음을 서둘러 다가오는 자는 관복차림이다. “이리 뵙습니다, 고운 선생. 의안태수 허(許)가 인사드립니다.”

■깨우침 바라는 의안 백성들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노성미(국어교육과) 교수가 최치원이 머물렀던 합포별서와 월영서원이 있던 터가 경남대 캠퍼스 안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의안태수는 치원을 포구에서 멀지 않은 집으로 안내한다. 마루가 달린 방이 세 칸이고 부엌 채에도 방이 있는 데다 문간방까지 있으니 초가이기는 해도 제법 번듯하다. 말끔하게 비질한 마당 가운데는 너른 평상이 놓여있고 키 큰 오동나무 아래 꽃밭은 가지런하다. 집주인의 성품이 담박하고 정갈하구나 생각하며 치원은 태수가 이끄는 대로 큰방 앞 마루에 올라앉는다. 태수가 뒤따라 마루에 올라 마주앉자 어느 틈에 무영이 찻상을 가져와 내려놓는다. 포구에서부터 뒤를 따른 사람들이 평상과 마당에 줄지어 앉자 태수가 입을 연다.

“이곳 의안은 예부터 바다를 목장으로 어로를 해왔으며 두척산(斗尺山·무학산)을 비롯한 여러 산과 너른 들에서 다양한 물산이 산출되어 배를 곯지는 않으니 인심에 여유가 있습니다. 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인사들은 바른 학문에 목마름이 크고, 그럴 수 없는 평민 중에도 배움에 뜻을 세운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큰 스승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중에 선생께서 오신다 하니 모두가 가뭄에 단비를 만나는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사직을 청하시고 이처럼 길 위에 나선 사정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대왕께서 가납하지 않으셨으니 무작정 은둔하실 수도 없을 터, 저희가 누추하나마 이곳에 집을 마련하였으니 별서(別墅·별장)라 여겨 머무시며 밝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치원은 문득 그가 허 씨라 밝힌 것을 떠올린다. 허 씨 성은 가락국 허왕후에서 시작되었다. 가야의 피, 혼란의 시대 아닌가. 저의가 있지 않을까 치원은 사뭇 의심스럽다.

“김해소경(金海小京)이 지척에 있지 않소?” 김해소경은 수로왕의 땅이며 옛 가야6국의 중심인 금관가야의 터전이다. “동북으로 바로 면하고 있습니다.” 답하는 태수에게 다른 기색은 없다. “의안에 조창(漕倉)이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인근 김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곡식을 모아 왕경으로 운송합니다. 서쪽의 두척산도 곡식의 양을 재는 ‘말 두(斗)’와 높이를 재는 ‘자 척(尺)’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혹여 저희의 배우려는 뜻이 궁금하시면 저들에게 직접 들으십시오.” 마당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태수는 치원의 염려를 아는 것이다.

마당에 앉아있던 사내가 일어선다. “저는 성도 없이 이름만 가진 그저 평민입니다. 관리가 될 수 없는 신분이니 꿈도 꾸지 않지만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 아비께서 부지런하고 계산에 밝아 재물을 늘린 덕분에 저는 바쁘거나 고단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심심풀이 삼아 책을 읽었는데 갈수록 답답합니다. 비록 관리도 못 되는 평민의 삶이라도 뭔가 바른 길이 있을 것 같고, 그래야 신분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데 아직 밝은 가르침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어 평상 위에 앉았던 이가 무릎을 꿇는다. “저는 5두품 신분이지만 아직 관직에 나가지 못하여 여전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때 서글픈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밝은 깨우침에 더 목이 마릅니다. 관직에 나가게 된다면 그 깨우침으로 위아래를 밝게 하고, 나가지 못하더라도 내일을 밝게 할 수 있다면 군자로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부디 저희의 눈과 마음을 밝혀주십시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읍(揖)하며 동의하니 의심은 거두어도 될 듯싶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의 마음이거늘

   
조선 후기 전국의 군현을 회화식으로 그린 ‘해동지도’ 속의 ‘고운대(孤雲臺)’.
“언제부터 준비한 것입니까?” 배우겠다는 인사들은 그렇다 해도 만호의 의도는 개운치 않은 것이다.

치원의 물음에 만호는 태연하다. “나라가 혼란할수록 백성은 왕경 소식에 귀를 세웁니다. 더구나 선생에 관해서는 뜻있는 사람이면 모두 우려와 함께 기대가 큽니다. 다들 역마에 선생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그 발길이 자신들에게 닿기를 고대하지요. 유가도 불가도 속 시원한 답이 없으니 선생의 가르침에서 희망을 찾아 내일을 기다려보겠다는 뜻일 겁니다. 뱃길로 교류하다 보니 친해졌고, 선생의 걸음이 해운포에 닿았다는 풍문에 태수에 앞서 지역인사들이 제게 청을 해왔습니다. 급히 집을 비워 별서를 마련한 건 아까 그저 평민이라 밝혔던 이의 재물이고요. 왕께서 힘을 되찾아 부르시면 돌아가셔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또 어디론가 떠날 수 있으신데 무엇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그저 마음 편히 머무시며 가르침으로 소일하시지요.” 만호의 말이 옳다. 뒤엉킨 상념에 잠시 잊었을 뿐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의 마음 아닌가.

치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영이 나선다. “왕경에서 부인과 식솔분들을 모셔와도 되겠습니까?” “안전하게 모셔올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거드는 만호에게 치원은 감사하며 두 손을 굳게 맞잡는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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