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척산 따라 펼쳐진 산줄기 중
- 대곡·봉화산·학봉 이어붙이니
- 날개 펴 춤추는 학 보듯해 감탄
- 야밤 월영대서 술잔 기울이며
- 듣게된 합포만 작은 섬 전설
- “돼지 울음소리·빛에 주민 떨어”
- 치원, 어둠 속 빛 향해 활 쏘자
- 기이한 현상 어느새 사라지니
- 백성들, 기우제 열고 영험 빌어
안해와 식솔이 무영을 따라 합포에 도착해 별서(별장)에 정착했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 후 내내 집안이 절반은 빈 듯했다. 부성군(현 충남 서산시)에서 왕경으로 돌아가 귀족들과의 갈등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중에도 그 빈자리는 한시도 잊힌 적이 없었다. 합포에 온 뒤로 드문드문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도 했는데 다시 식솔이 모이니 빈자리가 뚜렷하다. 그런 중에도 치원은 서찰 한 장을 들고 불쑥 찾아간 무영을 안해가 어찌 생각할지 마음이 쓰인다. 다행히 무영을 대하는 안해의 자세는 그저 공손할 뿐 거북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무영 또한 더욱 공손한 태도로 누가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희미하기도 하다. 치원은 스스로 마음에 욕망이 없으니 굳이 설명할 까닭이 없다 여기는데 무영은 어디를 다녀오겠다며 행장을 꾸린다. 치원은 해운포를 가려니 여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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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포만(마산만) 돝섬은 사방 투명한 바닷물에 푸른 숲이 우거진 세계적 관광자원이다. 선상호텔이라도 있어 바다 가운데에서 달그림자에 젖어 잠들면 용왕이나 인어공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왼쪽 위 산줄기가 무학산이며, 돝섬 우측이 두산중공업이다. 드론 촬영. 이원준 프리랜서 windstorm@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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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척산 줄기서 춤추는 학 찾다
이른 아침 합포만 모래밭을 걷다 문득 돌아서 눈길을 공중으로 향하니 두척산(무학산) 능선이 하늘과 경계를 선명하게 가른다. 어우러진 산자락들이 학(鶴)이 날개를 펴 춤이라도 추는 듯하다. 활짝 펼친 날개로 비상하는 학의 눈에 합포만은 어떤 감회일까. 치원은 서생에게 산길 안내를 부탁한다.
별서를 나와 뒷산을 얼마간 올라 만날고개가 나오자 서생은 대곡산 방향으로 두척산에 오를 것이라며 앞선다. 여기저기 펼쳐진 산줄기들을 돌아보느라 치원의 걸음이 늦어지면 앞서던 서생은 힘에 부치는 것인가 안쓰러운 눈빛이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로 가득하다. 그저 보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의 향연일 뿐이지만 별무리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이리저리 선을 그어 의미와 이름을 부여하는 이들이 있다. 산 또한 그러하다. 무심히 바라보면 그저 등성이고 줄기이지만 눈길을 달리하면 학이 보이기도 하고 용이 그려진다. 심안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낯 뜨거운 치사(致詞)이고 그저 마음일 것이다. 자연의 수많은 사물에 이런저런 이름이 붙은 것도 모두 그러할 테고.
서생에게 산 이름을 물어 대곡산과 봉화산을 이으니 펼친 학의 날개요, 북쪽 시루봉을 학의 꼬리로 삼으면 머리는 학봉이 되니, 학봉은 딱 학의 눈이다. 전설의 대붕(大鵬)인양 두척산 큰 줄기를 모두 아울러 활짝 날개를 펴고 합포만으로 머리를 향한 어우러짐이라니, 과연 더없는 조화이고 춤추는 학의 형상 아닌가!
걸음을 서둘러 학봉으로 내려가니 역시나 벼랑 끝에는 큰 너럭바위까지 있지 않은가. 오! 치원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지는데 한눈에 들어오는 의안(현 창원) 땅과 만과 바다는 신선이 그린 그림이며 천하의 길지이다. “신선이 이름뿐인 줄 알았더니 세상에 있었도다.” 치원의 넋두리에 서생이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린다. “선생님이 신선이신 듯합니다.” 대꾸인 듯 취한 듯 치원이 덧붙인다. “무학(舞鶴)이다. 춤추는 학의 등에 있으니 그대로 신선이고, 천하 어디라도 한 번 날갯짓이면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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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산 형상도. 산줄기에서 학을 찾아낸 고운의 눈이 부럽다. |
■돝섬으로 쏜 화살, 바다를 건넜을까
서생들이 돌아간 적막한 서원 앞 월영대에서 치원은 달그림자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인다. 문득 합포만 가운데의 작은 섬이 궁금해 곁을 지키는 서생에게 묻는다. “저 앞의 섬은 이름이 있는가?” “예, 돝섬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은 것 같은데 섬이 작아서인가?” “작아서가 아니라 전해지는 얘기가 있어 두려워합니다. 용궁으로 가는 문이 있다고도 하고요.”
‘옛날 가락왕께서 총애하는 미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홀연히 흔적을 감추었다. 그 얼마 뒤부터 밤이면 금도야지가 나타나 어린 계집아이나 젊은 부녀자를 잡아간다는 풍설이 퍼졌다. 이에 왕은 군병을 동원해 금도야지가 숨어산다는 두척산을 포위해 잡게 했다. 군병이 포위망을 좁혀 금도야지가 숨어있다는 바위 근처로 다가가자 홀연 바위 위에 절색의 여인이 나타나더니 금도야지로 변해 덤벼들었다. 군병이 창을 던지고 화살을 쏘아 막고 공격하기를 한참, 마침내 금도야지는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자 돌연 금도야지는 요사스러운 구름으로 변해 아지랑이처럼 돝섬으로 뻗어 사라졌다. 그 뒤 돝섬 근처에서는 밤에 도야지 우는 소리와 함께 수시로 괴이한 광채가 이니 사람들이 감히 섬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마산야화 : 돛섬의 전설’을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노성미 교수의 논문 ‘최고운전 기우모티프와 돝섬 기우제 비교 연구’에서 재인용)
“그래서 두척산의 금도야지가 요사한 기운으로 변해 저 돝섬에 틀어 앉아 사기(邪氣)를 뿜는다, 그런 이야기인가?” 치원의 물음에 서생은 자못 두려운 기색까지 드러낸다. “사기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도야지 울음소리가 들리고 괴이한 광채가 일면 가뭄이 들기도 하고 풍랑이 심해져 생업을 망치니 모두가 두려워할 수밖에요. 그래서 돝섬에는 용궁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용왕님이 노여워하시면 금도야지가 그 진노를 대신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인간은 한 길 사람의 속도 알지 못하는데 자연의 천변만화는 신이(神異)하니 한 번 두려운 마음이 들면 더욱 커져간다. 또한 두려움을 귓속말로라도 나누면 순식간에 천리를 가며 부풀려져 마침내는 사실이 되고, 전설로 굳어져 깨뜨려지지 않는다.
“보십시오, 선생님!” 별안간 목청을 높인 서생이 돝섬 방향으로 귀를 세운다. “저기 이상한 빛 하며, 울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치원의 눈에도 다른 때와는 다른 빛이지만 물결의 드문 일렁임 탓인가 싶고 울음소리도 그저 다른 바람과 파도의 엉킴이지 싶다. “궁시(弓矢)를 가져 오시게.” 느닷없는 지시에 서생은 의아해하며 얼른 발길을 뗀다.
■의안군에서 창원시까지 전해져온 신선 최치원
유학자라 하여 오직 경전(經典)만 익히는 것은 아니다. 예부터 문무(文武)를 함께 수련하였기에 예(禮)·악(樂)·서(書)·수(數)에 사(射)·어(御)를 더하였으니 활쏘기와 말 타기가 그것이다. 치원은 서생이 가져온 활에 살을 매겨 어둠 속 낯선 빛을 향해 힘껏 시위를 당긴다. 다음 날 돝섬에 들어가니 한 곳에 치원이 쏜 화살이 박혀있었고, 그곳에서 제를 올린 뒤로는 기이한 현상이 사라졌다 전한다. 또한 그로부터 그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 하여 오래도록 이어졌다.
말(斗)과 자(尺)를 상징하는 두척산에서 춤추는 학을 찾아내고, 그에 올라타 학의 눈으로 땅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대붕의 날갯짓으로 천하주유를 꿈꾸었으니 바로 신선이다. 바다 용왕의 사자(使者)를 화살로 달래고 제를 올려 용왕에게 비를 기원해 얻으니 또한 신선 아닌가. 최치원은 그렇게 의안군민에게 신선이 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살아있음이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