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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4> 사은표 지으며 외교 생각하다

왕의 양위에 치원 절치부심…‘풍류도(화랑도 전신)’로 희망의 길 다시 찾다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  |   입력 : 2020-07-12 20:06:23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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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자 재위 계승 승인한 당 황제
- 귀족들은 은둔생활 중인 치원에
- 감사 글 지으라고 또다시 명령
- 외교 위해 성의 다해 문장 올려

- 월영대 건너편 위치한 강선대
- 너른 바위 펼쳐져 풍광 빼어나
- 낚시하며 신라 구할 방안 고심
- 삼국통일 하나됐던 정신 되새겨

나는 번거롭다. 저들은 염치조차 없다. 아니, 잔인하다. 대왕의 병약하심이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이었나. 병세가 깊어진 것도 귀족을 비롯한 권력에 눈먼 자들로 인함이 아닌가. 어차피 왕의 수족을 잘라 눈과 귀를 막고 입마저 봉해놓고서도 양위라는 미명으로 북궁을 사제(私第·사저)로 삼게 하니 사실상 유폐 아닌가. 더구나 그토록 병세 깊으시다니 기다리면 저절로 이뤄질 일을 설마 불안해서인가. 그리 불안한데 왕의 곁에서 치워져 먼 곳에 은둔하는 내게 양위표(讓位表)를 지으라는 건 무슨 염치이고 잔인함인가.
   
월영대에서 바라보는 돝섬 건너편 산 모습은 대를 이룬 듯하고, 아래 해안에는 넓은 바위들이 있어 신선이 내려와 달빛을 즐길 만하니 ‘강선대’라 했다. 최치원은 그곳에서 신라의 새 길을 생각했다. 이원준 프리랜서
파발이 또 닿는다. 이번에는 ‘사사위표(謝嗣位表)’를 지으란다. 태자 요(효공왕)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승인한 당 황제에 대한 감사의 표다. 치원은 비로소 당과 신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명색은 당의 번국(蕃國)으로 칭신(稱臣)하며, 왕의 양위나 붕(崩·죽음)에 따른 재위 계승을 승인받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형식일 뿐이다.

당나라는 당대의 패권국이다. 동남서북으로 그 끝이 어디인지 아득하게 넓은 영토, 1억에 육박하는 인구.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 하여 천자(天子)를 칭하고, 땅은 세상의 중심이라 자처하지만 그것을 부정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서쪽 국경의 높고 험한 산을 넘으면 또 많은 나라가 있다지만 그들은 오직 교역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세상의 중심이니 천자니 하는 따위는 귀 밖으로 듣는다. 그러니 당의 사방 국경에서 멀지 않은 나라들은 칭신의 외교로 나라를 보존하는 형국이다.

연이어 ‘사은표(謝恩表)’도 지어 올리라 한다. 양위를 알리는 사신을 보냈을 때 그의 편에 경문왕(헌강왕의 父)을 태사(太師)로, 헌강왕(요의 父)을 태부(太傅)로 품계를 높여 내린다는 문서를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는 글이다. 이미 능(陵)에 든 왕에게 태사니 태부니 하는 허명이 무슨 영광이라 감읍하겠는가. 그러나 외교의 문장은 나라의 얼굴이고 품격이니 치원은 번거롭지만 미문으로 성의를 다한다.

■강선대서 새로운 길 생각하다

   
월영대에서 돝섬을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 쪽에 나즈막한 산이 있다. 그 모습이 대를 이룬 듯하여 강선대(降仙臺)라 불린다. 그 아래 해안에는 월영대 쪽과 달리 너른 바위들이 펼쳐져 있으니 신선이 내려와 달구경이라도 할 만한 풍광이다. 왕의 양위를 접한 치원의 비통함을 아는 서생들이 강선대 아래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배를 내어 치원을 태워간다.

한여름 무더위의 끝자락이 바닷바람에서도 느껴진다. 모두가 가을을 기대하며 들뜬 기운이지만 치원은 그저 술잔을 비울 뿐이다. 새로 왕이 즉위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쪽과 북쪽의 반란세력은 그 기세가 여전하고, 왕실의 이렇다 할 군사적 대응 소식도 없다. 왕은 그저 천첩에 빠져 정사에 무심하고, 귀족과 그에 결탁한 고관의 탐학만 더욱 기승이라는 풍문이다. 그나마 치원이 명을 받아 지어올린 ‘사불허북국 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가 나라의 정무라 할까.

   
강선대가 표기된 ‘진해의 고지도Ⅵ’(1899년). 빨간원이 ‘강선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 뒤인 698년, 그 유민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니 발해다. 713년 당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발해는 오늘날의 동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강역을 넓혀 신라와 국경을 맞대며 경쟁하였다. 737년 이후 평화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라와 달리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며 우월함을 과시했다. 신라가 쇠퇴의 길에 들고 발해 또한 유사한 처지였지만 두 나라의 자존심 경쟁은 여전했으니 당과의 외교관계에서 극명했다.

발해의 하정왕자(賀正王子) 대봉예가 발해가 신라 위에 자리할 것을 당에 문서로 청했다. 그러나 당 황제는 ‘나라 이름의 선후는 관례상 강약을 가지고 일컫지 않는다. 조정에서 제정한 등위(위계)를 지금에 어찌 국력의 성쇠를 가지고 고친다는 말인가. 예전대로 해야 할 것이니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비록 지금 발해의 국력이 신라보다 강하다 하나 나라의 위계를 그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이고, 조정은 ‘북국(발해)이 신라 위에 서겠다(거상)’는 것을 ‘불허’한데 ‘감사’하는 ‘표’를 지어올린 것이다. 신라의 백성이고 관리이니 마땅히 따라야 할 일이었지만 왠지 졸렬한 기분이었고 우스웠다.

“달이 나옵니다!” 누군가의 탄성에 고개를 드니 구름이 걷히며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빛을 발한다. 치원은 문득 다른 빛을 떠올리며 평민 서생에 묻는다. “조용히 낚시할 곳이 있겠나?”

■황산강의 용을 낚고 ‘청룡대’ 쓰다

   
고운이 직접 쓴 ‘청룡대 치원서’ 탁본.
의안군(현 창원시) 동남쪽의 바다와 면한 완포향(莞浦鄕·현 진해) 작은 포구는 황산강(낙동강)이 남해에 합류하는 곳이다. 그 언저리에 제법 큰 바위가 있는데 안전하게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데다 조수 차도 제법 있어 조황도 꽤 괜찮았다. 평민 서생은 치원을 그곳으로 안내해 조용히 낚싯대를 드리우게 했다.

가을이 다 지나는 동안 서생은 매번 씨알 괜찮은 물고기를 낚아 올렸으나 치원은 단 한 마리도 낚은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착하여 서생이 낚싯대에 미끼까지 끼워 바닷물에 드리워주면 치원은 그저 먼 바다로 눈길을 둔 채 종일 골똘한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낚싯대에 바늘이 있고 미끼를 끼웠으니 그저 줄만 드리웠다는 강태공과는 달랐으나 세월을 낚는 것은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겨울 해풍이 여간 매섭지 않다.

“선생님, 동지가 며칠 뒤입니다. 물고기는 낚지도 않으시며 이 추위에도 어찌 나오자 하시는 겁니까?” 서생이 묻자 치원은 오랜만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그래, 이제 다 낚았으니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되겠네.” “예, 무얼 낚으셨다고…?” 의아한 서생에게 치원은 유쾌하게 답한다. “황산강을 타고 내려온 용을 낚았지, 허허” 하더니 서생에게 먹과 붓을 준비하라 이른다. 치원은 나라의 비루한 현실을 타파할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을 바꿀 용이나 다름없었다. ‘풍류도(風流道·화랑도 전신)’, 애초에 있었던 길을 잊었던 것이다. 삼국을 통일하던 그때를 되새기면 왕권은 강해지고 신민(臣民)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강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천년을 이어갈 구심의 사상이어야 한다. 서생이 먹을 갈아 붓과 같이 내밀자 치원은 듬뿍 먹물을 찍어 바위 면에 힘차게 ‘청룡대 치원서(靑龍臺 致遠書)’ 여섯 자를 쓴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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