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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6> 다솔사의 벗을 찾다

다솔사서 만난 도선국사 “왕이 될 기운 가진 사람을 송악(지금의 개성)서 봤다”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07-26 19:47:22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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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벗인 지영·능민 스님 찾아
- 발걸음한 사천의 사찰 다솔사
- 법력 깊어 칭송 받는 도선 조우

- 미래 내다보는 신통에 대해 묻자
- “천지자연·사람 하나 되는 것이
- 음양·풍수의 본질일 뿐” 대답해

- 풍류도 되살리려 한다는 말에
- 삼한 후예 기둥 되게하라 전해
- 치원, 암울한 신라 앞날에 탄식

■언제나 위로가 되는 벗

   
1500년 역사가 깃든 경남 사천 곤명면 봉명산 품안에 안긴 다솔사 전경.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중건을 거듭했으나 탱화 뒷면에서 108과의 사리가 우연히 발견돼 1979년 적멸보궁이 되었다. 사천시 제공
치원은 길을 포촌현(현 사천시 곤명면)의 다솔사(多率寺)로 잡는다. 지증왕 4년(503년)에 연기조사께서 창건하며 ‘영악사(靈嶽寺)’라 하였는데 근년에 도선국사께서 중건하며 다솔사로 바꾸었다. 창건 400년이 되어가는 역사에 선덕여왕, 의상대사와의 인연도 깃든 명찰이지만 지금 치원의 걸음은 벗처럼 여기는 지영(知英), 능민(能敏) 두 스님을 만나려는 것이다.

포촌은 동쪽의 사수현(泗水縣·현 사천시 일원)과 함께 본디 포상팔국(浦上八國·가야 때 낙동강 하류와 경남 해안 일대의 8개 소국) 중 하나인 사물(史勿)국이었다. 법흥왕 대에 신라에 정복돼 고성(固城)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는데 다시 나라가 혼란에 빠져드니 견훤세력과 신라군의 각축으로 수시로 전장(戰場)이 되기도 한다.

절로 향하는 산길로 들어서니 나이테가 수십 개를 훨씬 넘을 법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절이라도 하듯 허리를 굽힌 채 늘어서있다. 이른 봄 살바람의 찬 기운이 정신을 맑게 하는데 은은한 솔향까지 더해지니 마음도 산뜻해진다.

절집은 찾으면 위안을 얻는다. 때로 과하게 화려한 가람은 마음을 허탈하게 하고, 왕실과 귀족에 지나치게 기대는 승려들을 보면 열리던 마음의 문이 도로 닫히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에 비할 바는 아니니 굳이 담아두려 하지 않는다. 방편이리라, 모두가 이루지 못하는 욕망에 헐떡이니 위로가 되어주고, 더 많은 중생을 껴안기 위한 방편 말이다. 글로 읽는 석가의 말씀은 고뇌의 행로만큼 난해하지만 깨우친 진리이기에 마음은 맑아지고 고개는 숙여진다. 전하는 사람이야 어떠하든 불가의 참 정신을 깊이 알고 싶다.

눈앞 언덕 위로 절집 지붕이 보이자 지영과 능민이 더욱 눈에 선하다. 우연히 들른 절집에서의 만남이 시작이었지만 부족함을 감추지 않고 솔직담백하니 이내 오랜 벗인 양 인연이 깊어졌다. 어디를 가든 서로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려 차담(茶談)을 나누고 때로는 짓궂은 장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르듯 달려오는 발소리에 눈길을 보내니 지영이다. “고운 아니신가!” “어허, 절집 스님이 무슨 달음박질이신가!” “예끼, 반겨줘도 탓인가!” 덥석 서로의 두 손을 맞잡고 너털웃음을 나누다 지영이 목소리를 낮춘다. “인연일세, 귀한 분이 와계시네.” “누구?” 치원의 물음에 지영은 환한 웃음을 머금는다. “도선국사님일세. 며칠 전에 문득 오셔서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하는 듯 머물고 계시네.”

■도선국사 말씀에 귀 기울이는 치원

   
도선(道詵)은 법력이 깊어 국사(國師)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세수 15세에 불문에 들어 화엄을 통달하고 선종으로 개종하여 선승으로 이름을 높였다. 무엇보다 음양풍수에 밝아 여러 사찰을 창건하고 중건했으며 나라와 사람의 앞날을 예견하기도 한다. 몇 차례 우연한 인연으로 뵈었는데 벌써 30년 넘게 다사강(多沙江·지금의 섬진강) 하구 서쪽 희양현(曦陽縣·지금의 광양시)의 백운산 옥룡사(玉龍寺)에 주석하시며 가끔 세상을 주유한다 들었지만 찾아뵙지는 못하였다.

치원은 걸음을 서둘러 국사께서 머무시는 요사채 방문 앞에 이르러 인기척을 내고 “최치원입니다” 알린다. 벌컥 방문이 열리는데 능민이다. “어서 드시게.” 치원은 방에 들어 삼배를 올리고 국사를 대면한다. 세수 72세라 해도 기력이 너무 쇠해 보인다. 치원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국사는 “귀한 인연을 만날 것 같아 찾았더니 역시 그랬군” 하시며 환한 웃음을 지으신다. 부처의 그 미소다. “제가 게을러 이렇게 뵈옵니다. 안색이 어둡습니다.” “어떤가, 세존의 친견을 그리 기다렸는데 되려나 모르겠네, 허허. 아무튼 그 전에 인연도 풀 겸 움직였네.” 능민이 차를 준비하러 나가자 국사는 치원을 무릎 앞으로 다가오라신다. “묻고 싶은 건 없는가?” 치원은 주저하지 않는다. “국사님의 신통(神通)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다솔사 중건비. 최치원과 지영, 능민 스님과의 인연이 기록돼 있다.
빙그레 머금었던 웃음을 거두며 국사는 정색을 짓는다. “눈을 맑게 해 천지를 살피다 보니 천지인(天地人)이 하나임을 보게 되었는데 그걸 신통이다, 숙명통이다 하는 모양일세. 비록 사람이 뭇 생명 중에서 제법 영민하다 하나 천지자연과 다른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깨우치지 못하니 여전히 우둔한 것이지. 하늘이 비를 내리면 사람만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생명이 젖지 않는가. 심지어 허공까지, 바람까지, 땅의 속까지. 그와 같이 사람은 사람과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 모든 것과 나누고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 말 없는 산천이라 하여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니 그 위에 얹혀살더라도 기를 살펴 함께해야 영원공생(永遠共生)할 수 있음이네. 그게 음양이니 풍수니 하는 것의 본질이지.”

“도량은 대부분 좋은 기가 느껴지는 곳을, 곳에 들어섭니다.” 하마터면 ‘곳을 차지합니다’ 말할 뻔했는데 국사께서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도량은 기도하는 곳이 아닌가. 사람의 기만으로는 모자라니 산천의 기운을 더하려는 것이네. 기가 너무 강하면 탑으로 억누르기도 하고, 부족하면 나무나 숲을 조성해 보(補)하는 것인데 중생들 눈에는 좋은 곳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걸세, 허허.” 찻상을 든 능민을 따라 지영까지 들어와 국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터져 나오는 탄식 억누르다

   
음양풍수의 대가였던 도선국사 존영.
이번에는 국사께서 치원에게 묻는다. “뜻을 세운 것 같은데 무엇을 하려는가?” 치원은 아직 또렷하지 않지만 그러기에 더욱 국사의 뜻을 듣고 싶어 감히 답한다. “나라가 이처럼 쇠하게 된 것은 우리의 정신을 잃어서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국조 단군의 홍익이념은 유가의 인(仁)의 정치, 불가의 평등과 자비, 노장의 무위자연과 결국 일맥상통하며 신라의 화랑도가 그 융합이었다 여깁니다. 그러나 이미 화랑의 정신은 그 맥을 잃었으니 풍류도로 되살려 천년의 기반 닦기를 원합니다.” 국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견한 뜻일세. 나는 이미 늦었으나 그대는 반드시 이뤄 삼한 후예들이 단단한 기둥으로 삼게 하시게.”

신라의 국사이면서 굳이 삼한이라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신라의 앞날이 그리 암울합니까?” 에두르지 않은 치원의 직문(直問)에 지영과 능민은 찻잔에 눈길을 담고, 국사는 어두운 낯빛이 되어 한 모금 찻물로 입안을 적신다. “언젠가 송악(松岳·현 개성시) 쪽으로 걸음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하늘과 사람과 땅을 잇는 기운의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네.”

하늘 사람 땅을 잇는다면 곧 왕이다! 치원의 놀란 기색에 국사는 말을 잇는다. “나라는 뭇 사람에 달린 것이니 누구도 그 명운을 단언할 수 없는 법이지. 그렇지만 한 사람의 그것은 비교적 또렷한데 아직 그 빛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모를 일이지.” 비록 지금 궁예의 기세가 강하다 하나 그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송악의 사람이라면 신라의 앞날은…. 치원은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억누른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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