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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7> 武의 기운이 승한 다솔사

민심 탐방 중 마주한 남일대… 동산이 둘러싼 해안 삼면 비경에 넋 잃어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08-02 19:21:5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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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솔사서 귀한 만남한 도선국사
-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 풍류도 완성 신신당부 후 떠나

- 치원, 사천 남쪽해안 유람하며
- 주막서 만난 바다 진미에 흐뭇

- 주모가 코끼리바위 구경 권하자
- 코끼리 직접 본적 없는 무영에
- 치원, 당나라서 본 모습 설명

- 남일대 동쪽 끝에 위치한 바위
- 코로 물 마시는 형상에 감탄만

핫! 허이! 으차! 합! 치원이 새벽예불을 마치고 돌아와 좌선에 든 동안 요사채 뒤편 공터에서는 짧고 강한 기합소리가 이어진다. 수벽치기를 연마하는 소리다. 수박(手拍)이라고도 하는 수벽치기는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무예로 절에서는 주로 호법승들이 연마한다. 소리의 주인인 지영과 능민은 호법승은 아니지만 신체를 수련하는 방편으로 삼은 모양이다. 아침 공양시간도 된데다 장난기가 동한 치원이 방을 나선다.
   
오직 나만을 위한 포근한 한 품 해변으로 숨은 듯 가장 빼어난 풍광의 남일대해수욕장은 지중해에 비견할 만큼 아름답다.
“엄숙한 절집에서 무슨 주먹다짐 연습인가?” 치원의 소리에 수련을 멈추는 두 승려의 뒤쪽에서는 무영이 빼어든 검으로 허공을 가르다 따라서 멈춘다. “검을 휘두르는 낭자도 있는데 주먹다짐이 무슨 대수인가.” “쯧쯧, 승려가 속인을 핑계 삼다니. 아무래도 절집에 마음을 두지 못한 게야.” “예끼! 저리 고약한 인사를 승방에 들였으니, 쯧쯧.”

치원이 이번에는 무영을 향한다. “자네는 어찌 절 마당에서 검날을 보이는가.” “송구합니다.” 무영이 고개를 숙이자 지영이 끼어든다. “아닐세, 우리가 그리 하라 했네. 검의 기세가 얼마나 날래고 정확한지 예(藝)의 경지였네. 자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어.” “부끄럽습니다. 이상하게 기운이 좋아 감히 검을 빼었습니다.” 그렇게 주고받으며 공양간을 향하는데 도선국사께서 다가온다.

   
네 사람이 합장하고 인사하자 국사께서도 마주 합장한다. “기운이 좋다고 했나? 맞네. 여기 봉명산(鳳鳴山)은 본디 무(武)의 기운이 승한 땅일세. 내가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이끌다’는 다솔(多率)로 한 것도 그 기운을 받아들인 것일세. 옛날 한 선사께서 우리 삼한 땅의 지세를 보고 산세가 홀연 끊어지거나 불쑥 가파르게 솟기도 하니 마치 기혈이 고르지 못한 사람과 같아 전란이 잦을 수밖에 없다 하셨는데 과연 그렇지 않은가. 돌아보면 알겠지만 산중 도처에 들어선 사찰은 대부분 그런 혈의 위치로 국토를 평안하게 하려는 비보(裨補)의 술(術)이네. 여기 곤명도 삼한 이래로 나라 간의 경계가 된데다 왜구까지 들끓으니 다툼과 침입이 끊이지 않았네. 산 아래 무고(武庫)가 있는 것도 그런 전란에 대비하는 역사였으니 국토와 중생을 지키려면 중이라도 단련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이끄는 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사는 그윽한 눈빛으로 치원을 돌아본다.

“내가 음양풍수에 밝다고들 하지만 불가에서는 본디 신통(神通)을 경계하고 수행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가, 나 또한 다를 것 없고. 고운 자네는 유불선에 두루 밝으니 내 흔적에 연연하지 말고 풍류도 완성에 매진하시게. 어디에서 쓰일지는 염두에 두지 말고. 사람은 그저 진력을 다하고, 그 다음은 하늘이 정하지 않겠는가.” 치원이 합장하며 머리 숙인다. “유념하겠습니다.” “난 이제 다시 (광양)옥룡사로 돌아갈 것이니 자네는 기왕 나선 걸음 바닷가도 둘러보고, 특히 각산에 올라 남쪽 바다 풍광에도 젖어보시게.”

■도선국사의 유종지미

   
코를 바다에 박은 형상의 코끼리바위는 남일대 해변 동쪽 끝에 숨어있다.
길이 갈리는 곳에서 치원은 국사를 배웅한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은 분명 석양이지만 어둠보다는 장엄한 광배가 유종지미(有終之美)를 보여준다. 다시 뵈올 수 없는 마지막임을 직감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연이 언제나 그런 것을….

기왕 나선 걸음이니 사수현(현 사천시)을 가로질러 남쪽 바닷가까지 간 뒤 해안을 따라 다시 북상하며 산천과 민심을 두루 살필 요량이다. 치원이 길을 잡아 걸음을 내딛자 무영은 언제나 그렇듯 서너 걸음 떨어진 뒤쪽에서 묵묵히 따른다. 여태는 별일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위험과 맞닥뜨릴 각오를 해야 한다. 신라와 후백제를 참칭한 견훤세력이 일진일퇴하는 데다 왜구가 아니라도 해안과 산중에는 도적이 들끓을 테니 말이다.

해가 중천에 일러 허기를 느끼자 무영이 앞에서 길을 잡아 시장으로 들어서더니 제법 사람이 들어찬 주막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치원이 먼저 들어가 빈 탁자 앞에 앉자 무영은 주모에게 다녀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생선국이 좋다 하여 시켰습니다.” “잘했네.” 주변을 둘러보니 탁자마다 탕 그릇 말고도 찬을 담은 접시가 여러 개다. 이내 주모가 들고 와 내려놓는 접시에는 말려 구운 생선, 새끼생선조림, 생선젓 따위와 나물 반찬 몇 가지가 담겨있다. “주막 찬이 제법 풍성하구려.” 치원의 인사에 주모는 “그래봐야 육고기는 없고 생선뿐인 것을요.” 답하며 송구하다는 기색이다. 내륙이라면 진수성찬이라 해도 무방할 텐데, 생각하며 치원은 미소를 머금는다. “볼만한 바다 풍광이 있소?” “남쪽으로 부지런히 가시면 해 지기 전에 바닷가의 기이한 바위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코끼리바위라고 하는데 저희야 그게 뭔지 알기나 해야지요.” 그 소리에 무영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치원은 당에서 코끼리를 보았지만 신라 사람들이야 알 턱이 없다.

■신선이 모여사는 선경의 호수

   
통영 다찌, 마산 통술에 비견되는사천 실비집 한 상 차림. 바다의 풍성함이 끝없이 이어지는 안주 문화를 만들었다.
걸으며 치원은 무영을 곁으로 불러 코끼리 형상을 설명해준다. 말과 손짓으로 그리는 모습으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무영은 실감이 안 된다. 그래도 이처럼 다정히 대해주는 마음만으로도 기쁘고 설렌다. 서쪽 견훤보다는 북쪽 궁예 세력에 더 마음이 가는 무영이다. 그렇지만 그간 드나들며 살핀 느낌은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니 치원에게는 기미도 내보일 수 없다.

걸음을 서둘렀더니 주모의 말처럼 아직 해가 남아있을 때 바닷가에 닿는다. 작은 해안이다. 고향 해운포와 같은 넓은 해안에 익숙한 무영은 단박에 실망하는데 잠시 눈초리를 세우던 치원은 두 눈을 번쩍 뜨며 환한 낯빛으로 탄성을 터뜨린다. 서쪽 바다를 건너 돌아오고, 삼한의 삼면 해안을 두루 돌아보았지만 이 같은 해안은 처음이다. 작은 모래사장 앞으로 열린 바다 말고는 삼면이 모두 아담한 동산으로 둘러싸였으니 탁 트인 수평선만 아니라면 신선이 모여 사는 선경의 호수라 할 것이다. 한 품에 안길 듯 아담하지만, 오직 나와 우리만을 위해 그만큼만 펼쳐놓은 백사장! 눈처럼 고운 하얀 모래, 맑은 옥빛 바다의 눈부신 햇살, 저 멀리로 드문드문 바다에 박힌 듯 들어선 섬들….

치원이 넋을 놓고 있는데 다가온 주민이 말을 건다. “유숙하실 건가요?” 치원은 대뜸 “술이 있소?” 묻는다. “예, 넉넉합니다. 안주는 오늘 잡은 돌문어며 고둥이며 여러 생선이 풍성하고요.” “방은 둘이 필요하오.” “예, 치워놓겠습니다. 그동안 저기 동쪽 해안을 따라가시면 기이한 바위를 볼 수 있으니 다녀오십시오.” “코끼리바위 말이오?” “글쎄요, 그게 뭔지 알아야지요. 아무튼 기이합니다. 여기 백사장은 조개껍질 부서진 가루로 이뤄진 것이라 관절과 피부에도 좋다 합니다.”

치원은 무영을 따르게 해 동쪽 해안을 걷는다. 얼마 가지 않아 해변이 끝나는 지점에 과연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박고 물을 마시는 형상의 바위가 산과 이어져 있지 않은가. 치원은 파안대소하며 “과연 코끼리구나! 참으로 그렇다! 남쪽바다 한 곳에서 숨은 듯 가장 빼어난 풍광에 이런 기이한 형상까지. 남일(南逸)이다, 남일! 하하하!”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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