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딱팔딱 뛰는 생선 가득한 포구
- 수탈·전란에 눈물 짓는 백성들도
- 모처럼 입가에 웃음이 넘쳐 활기
- 그들 눈높이로 민심 보리라 결심
- 도선국사 추천한 사천 각산 올라
- 섬들 점점이 박힌 남해 비경 감탄
- 신선 되어 창공 날고 싶단 생각도
- 하늘 붉게 물들이던 실안의 석양
- 사방을 검붉게 만들다가 사라져
- 치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 나라위해 온 생애 힘쓰리라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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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산에서 조망하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은 누구라도 신선이 되기를 소망케 한다. 사천시는 2년 전 바다케이블카를 개통해 이 소망을 이룰 수 있게 했다. 사천시 제공 |
■포구 시장에서 백성의 삶 보다
은은한 달빛으로 잠들었다가 고요하게 천천히 깨어나는 남일대의 아침은 매일 만나도 언제나 처음일 듯싶다. 상쾌한 바닷길 아침산책이 길어지기도 했지만 치원은 오늘 천천히 걸을 요량이다. 낙조가 아름답다는 실안까지는 반나절 걸음이 안 된다니 포구의 시장도 기웃거리고 어민의 삶도 돌아보며 도선국사께서 말씀하신 각산에 올라볼 작정이다.
서너 척 작은 배가 들어왔는데도 포구에는 생선이 그득하다.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바라보는 어부와 기다리던 아낙과 상인들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넘친다. 많기도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다양한 종류의 생선에 치원은 휘둥그레 큰 눈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모습에 무영까지 모처럼 함박 미소를 머금는다. 활기가 넘친다. 누군가는 풍랑으로 잃은 가까운 사람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했을 테지만 또 그렇게 잠시 웃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 아니겠는가. 아직은 괜찮지만 더워지면 생선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바로 답이 온다. 싱싱하면 날로 먹고 팔고, 그래도 남으면 해풍에 말리고, 아예 더우면 소금으로 염장하면 되니 그저 많이만 잡히면 좋다니, 참으로 단순하지 않은가. 고단해도 지나가면 그만인 삶이기에 살만한 것이란다. 진정 두렵고 눈물을 마르지 않게 하는 건 가렴주구와 전란뿐이라니 백성의 삶에 걸림은 오직 나라와 권력뿐인가 한숨이 절로 새어나온다.
내내 두꺼운 서책과 높은 담장 안에서만 세상을 보았다. 당으로 떠나기 전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까맣게 잊은 채 결국 권력의 울안에서 백성을 생각했으니 눈은 감은 채 코끼리 다리나 더듬은 격 아닌가. 이제는 두 눈을 밝게 해 백성의 삶을 보리라. 그들의 마음과 아픔과 눈물을 보아야, 말하지 못하는 설움과 분노를 들어야 참된 희망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권력을 내려놓고 이름을 감추고 그들의 삶속으로 섞여드니 이내 말문을 연다. ‘나라의 주인이 누구든 백성이 무슨 상관이오.’ ‘그놈이 그놈, 주인자리를 차지하면 달콤한 말들은 말짱 거짓이 되고 다시 같아지니 우리네야 누가 되든 빨리 혼란이 끝났으면 바랄 뿐입니다.’ 아뿔싸! 이게 백성의 마음이었구나….
■옥빛 바다의 죽방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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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사천 실안낙조. 붉은빛과 황금빛이 타오르는 바다 가운데 떠있는 죽방렴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
포구에서 낮 요기를 하고 북으로 방향을 잡아 해안을 따라 쉬엄쉬엄 걸으니 오래지 않아 오른편에 각산(角山·해발 398m)이 나온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바다에 면해있는데다 제법 가파르기도 하니 위엄이 있다. 바다 건너 서쪽의 포촌현(현 곤명면)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남쪽과 북쪽도 멀리까지 내려다볼 수 있으니 군사적으로도 요충이 될 듯싶다. 뒷날 고려가 들어선 뒤 산성을 축조하고 봉수대를 설치했으니 때가 되면 자연과 사람은 그리 어우러지는 것이 지리의 이치이고 풍수의 쓰임인 모양이다.
산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무영은 숨결도 걸음도 가볍다. 든든한 동행이기는 하나 그의 청춘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하지만 보통의 삶은 스스로 외면했으니 쓰임을 찾아주는 것으로 보답할 방법일 것이다.
정상에 이르자 과연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이 아리도록 푸른 바다 곳곳에 크고 작은 섬이 점점이 박혀있는, 그야말로 그림이요 여태껏 어디서도 보고 듣지 못한 풍광이다. 눈물이 나려한다. 보석이 부끄러워할 빛이로구나 남해여! 이런 아름다움을 품은 신라의 찬란함이여!
마침 지게를 진 나무꾼이 뒤쪽 등성이에서 다가오니 치원은 그에게 묻는다. “저 앞바다의 섬들은 모두 이름이 있소?” 나무꾼이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답한다. “하루를 살다가는 날벌레에게도 이름이 있는데 천년만년을 이어오고 이어갈 신령한 땅들에 어찌 이름이 없겠습니까.” 맞다. 백성은 무지렁이가 아니다. 글은 몰라도 세상 이치에는 책 속 글에 뒤지지 않는다.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섬은 초양도고, 뒤편 큰 섬은 늑도, 그 왼쪽으로 솔섬, 장구섬, 신수도, 추섬이라 합니다.” “바다에 박힌 보석들이구려.” “오른쪽을 보십시오. 건너편 포촌쪽에 보이는 큰 섬은 비토섬이라 하는데, 가까운 북쪽 월등도와는 조류에 따라 물이 빠지면 신기하게 바닥이 드러나 걸어 건너다니기도 합니다.” “비토라는 이름이 별스럽구려.” “날 비(飛), 토끼 토(兎). 토끼가 날아올라 이름이 그리되었다 합니다.” “사연이 있겠구려.” “월등도 뒤로 작은 섬이 두 개있는데, 용궁에서 돌아오던 토끼가 달빛에 어린 육지를 보고 급히 뛰어내려 바닷물에 빠져 죽으니 토끼섬이 되었고, 그 토끼를 놓쳐 용왕님께 벌을 받을까봐 거북이는 그 자리에서 섬이 되어 거북섬이라 한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에는 그럴듯한 사연을 쌓아둔다. 그저 이름만으로는 언제 잊힐지 모르니 그 이름을 오래 지켜가기 위함이리라. 과연 뒷날 누군가 두 섬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니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별주부전’이다.
“초양도와 그 오른편 섬 근처 몇 곳 바다에 담처럼 나뭇가지로 둘러놓은 건 무엇이오?” “그건 대나무 어사리입니다.” 대나무 어사리는 죽방렴(竹防廉)으로, 센 물살이 드나드는 좁은 바다 물목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그물을 매달아 조류에 밀려들어 갇힌 물고기를 물살이 약할 때 건져 잡는 고대로부터 전해져온 어로 방식이다.
죽방렴으로 잡은 물고기는 거친 물살 속에서 자라 그 살이 단단하고, 어로 과정에서 상처를 입지 않으니 다른 생선에 비해 맛이 월등하다. 특히 멸치는 죽방렴의 대표 어종으로 예부터 삼천포 ‘죽방멸치’는 맛이 뛰어난 데다 염도도 낮아 그 명성이 자자하다.
■실안낙조에 젖어 인생을 생각하다
각산을 내려온 치원은 마도와 저도가 손에 잡힐 듯한 실안의 바닷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 낙조가 아름답다지만 아직 해가 남은 지금 이대로도 만족하다. 그럼에도 치원은 석양을 기다리며 문득 무영을 돌아본다. “내가 각산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무영은 고개를 젓는다. “처음으로 선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네. 저 드넓은 창공을 마음껏 가르며 바다를 오롯이 가슴에 담고 싶어서 말일세.” 무영은 피식 웃음을 짓는다. “정말 신선은 하늘을 납니까?” 치원은 그저 허허 웃는다.
너무 밝아 색을 구분할 수 없던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동쪽 바다를 가르고 솟아올라 종일 세상 가득 빛을 뿌려주고 그만 하루를 쉬러 서쪽 바다에 몸을 담그려하니 ‘고마웠소’ 말하며 손 흔들어 전송해야 하나. 인간사도 그처럼 저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다! 그저 붉은가 싶더니 금빛이 어른거리고, 폭발하듯 벌겋게 타오르더니 순간, 사방이 어둠에 젖어든다. 빛은 남아있지 않아도 눈앞의 죽방렴, 가까이 섬, 먼 섬, 더 먼 곳의 산…. 그 모든 것에 붉은빛, 황금빛, 검푸른빛, 벌겋게 타오르는 검붉던 빛이 되살아나는 듯 어른거린다. 나도 저처럼 벌겋게 태워 사그라지리라! 마지막까지! 생애 온 시간을….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