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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9> 법계사와 단속사

단속사 출입 통로였던 바위 틈새… 치원은 ‘구제하는 문’(광제암문) 이라 이름 붙여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8-23 19:34:30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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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성산 지리산으로 향하여
- 법계사·천왕봉 신령한 기운 만끽

- 단속사 가던 중 만난 장엄한 바위
- 마치 절 지키는 수호신인양 우뚝
- 속세와 단절케하는 문이라 여겨

- 주지와 바위 대해 이야기 나누며
- 나쁜 기운과의 단절임을 깨달아
- 백성 구제 뜻담아 문호 일필휘지

■신라의 성산 지리산으로 향하다

   
깎아지른 바위벽과 그 뿌리 위에 얹힌 또 한 바위 사이의 좁은 문. 널리 구제하는 길의 문은 과연 엄숙하고 신비하다. 산청군 제공
사수현(현 사천시)에서 실안의 낙조를 보고 다시 다솔사에 들러 며칠 더 머문 치원은 지리산(智異山)으로 길을 잡았다. 지리산은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의 맥이 흘러내렸다 하여 두류산(頭留山)이라 불리며 일찍부터 산신신앙의 대상이 되어 삼산오악(三山五嶽) 중 하나로 제사 지내고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옛 고구려의 영역으로, 아직 한반도 중부지역을 국경으로 삼고 있는 신라에선 지리산이 가장 높고 신령스러운 성산이었다.

신라가 한창 번성하던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께서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 아래에 터를 잡고 천축국(인도)에서 갖고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해 적멸보궁으로 창건하니 법계사(法界寺)다. 치원은 동국(東國)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자리한 적멸궁의 신령한 기운을 받고, 법계사가 흥하면 바다 건너 왜국의 기운이 쇠한다는 풍수적 지세도 살펴볼 요량이다.

옥수(玉水) 같은 계곡물 위 돌다리를 건너 모퉁이를 돌자 멀리 중턱에 걸린 한 무리의 띠구름 위로 지리산 봉우리들의 줄지은 모습이 나타난다. 참으로 신비하다. 그중 가장 우뚝한 천왕봉은 가슴이 서늘해지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만큼 장엄하다. 지리산은 여러 군현에 걸쳐있어 천왕봉을 오르는 길 또한 여럿이리라. 그중 궐성군(闕城群·현 산청군)에서 출발해 하늘을 찌를 듯 칼끝처럼 뾰족한 날을 세운 칼바위 길로 오르는 것이 가장 가깝기는 하지만 도중 두 손 두 발로 네 발걸음을 할 만큼 험난하다 한다. 그럼에도 굳이 이 길을 잡은 것은 천왕봉의 가장 위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하다. 걸음을 멈추고 천왕봉과 줄지은 연봉을 눈에 담는데 구름이 하늘 위로 번져 모습을 감추니 치원은 다시 발을 뗀다.

■사천왕 엄한 기운의 석문

   
법계사를 보고 천왕봉까지 오른 뒤 다음 행로를 단속사(斷俗寺)로 정했다. 창건한 지 이제 100년 남짓하지만 현덕왕 5년(813년) 왕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여 가람의 규모가 장중하다 들었다. 그러나 치원은 그보다 ‘단속’이라는 이름의 결연함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주민들에게 물어 길을 잡아나가던 무영이 제법 폭 넓은 개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 개울을 건너면 큰 바위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고 거기서부터 절 땅인데 단속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개울을 건너자 치원은 그대로 걸음을 멈춘다. 발 앞 두 바위 사이로 난 길은 길이 아니라 바위의 뿌리다. 오른편, 두 폭 가리개를 반으로 펼쳐 세운 듯 절벽처럼 가파르게 하늘을 가리며 버티고 선 바위의 뿌리가 개울을 향해 뻗어있고, 그 위에 얹힌 듯 버티고 선 왼편 사각 바위는 불문(佛門)의 수호신인 양 완강하고 늠름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두 바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손바닥만 하다. ‘단속’이 ‘속세와의 단절’의 의미라면 그 문으로는 더할 것이 없지 않은가!

   
광제암문(廣濟嵒門) 글씨를 확대한 것.
치원은 멈춰선 그대로 오른편 바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깎아지른 바위 면은 굴곡 없이 평편하여 당호(堂號)라도 써달라는 듯하고, 윗부분이 약간 돌출되어 전체적으로는 약간 앞으로 기운 모습이어서 날카로운 햇볕이나 비가 들이쳐도 쉬 마모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천왕 같은 완강하고 엄한 기운의 석벽에 당호를 새기리라.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퇴색조차 되지 않을 하늘과 땅이 빚은 엄문(嚴門)에 새길 글이라면…. 치원은 마음이 바빠져 걸음을 서두른다.

일주문을 지나자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장대한 가람. 좌우로는 청룡 백호처럼 지리산 지맥 줄기가 든든히 에워싸고 뒤에는 포근한 기운의 아담한 높이의 산, 그 뒤로는 또 겹겹이 높이를 더하며 버티어 선 지리산 줄기. 그저 보아도 천하길지가 아닌가. 치원은 당간지주를 지나며 마주친 젊은 중에게 유랑에 나선 뒤 처음으로 이름과 이전 관직을 밝히며 주지스님 뵙기를 청한다. 그는 단번에 이름을 알아듣고 황망한 듯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앞장선다.

■문의 이름을 둘러 집을 짓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지리산 법계사 전경. 드론 촬영.
“단속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입니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주지가 찻잔을 내기도 전에 치원이 묻는다. 주지는 잠깐 의아한 기색을 띠었지만 금방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다. “여기 단속사는 창건 당시부터 신라 대왕님들의 복을 빌고 있습니다. 어찌 속세와의 인연이 끊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떤 의미인지요?” 주지는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차를 따라놓고 치원이 목을 적시기를 기다린다. 그제야 치원도 바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찻잔을 든다.

“석문의 소리를 들으신 겁니까?” 농담 같은 물음에 치원은 주지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허허, 어디 소리가 귀로만 들리겠습니까. 마음으로도 듣는 게지요.” “주지께서는 들으셨습니까?” “웬걸요, 소승의 아둔함으로야 어찌. 다만 들을 수 있는 이가 오면 말을 하겠구나 짐작은 했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하늘이 빚은 엄한 문일 테지요. 속세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 삿됨과의 단절이니 엄한 문이 있어야지 했을 테고요. 그래, 고운 선생은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치원은 망설이지 않는다. “오른편 석벽에 당호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지는 문득 옆에 놓인 주장자를 손에 잡아 크게 방바닥을 내려친다. “역시! 선생을 기다린 것입니다. 다만 당호가 아니라 문호(門號)라 해야겠지요. 창건 이래로 모두 그 생각을 했지만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인연으로 오셨으니 글을 주십시오.” 주지가 벌떡 일어나 삼배를 하니 치원도 황망하게 일어나 맞배를 한다.

   
보물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만 남은 단속사지. 언제 보아도 참 안온한 천하길지이다.
‘삿된 기운을 끊고 불성으로 모든 중생을 부처로 이끌리라.’ 창건 이래로 주지스님들이 품은 뜻이라 한다. 석가의 본래 뜻이요, 창건의 소망이요, 그간 이어져온 간절함이다. 어찌 그 뜻을 담아야하나. 사흘을 대웅전 부처상과 마주하던 치원이 마침내 지필묵을 가져오라 한다. 무영이 먹을 가는 동안 펼친 종이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치원이 붓을 들어 먹을 적시더니 힘차게 오른편 위아래 두자, 다시 왼편 위아래 두 자를 쓴다. ‘廣濟嵒門(광제암문)’. 글자 그대로는 ‘널리 구제하는 바위 문’이다. 대왕의 복을 비는 것은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강성함을 바라는 것이고, 그로써 만백성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니 널리 구제하는 기원으로 들어가는 문이지 않은가.

특이하게 글자 좌우에 벽처럼, 아래에 바닥처럼, 윗부분에 지붕처럼 두 겹 직선과 사선이 그어져 집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 글자 옆에는 일부 마모된 작은 글들이 있어 최치원이 쓴 것인지에 대한 이설의 빌미가 된다. 그러나 ‘신동국여지승람’에 최치원의 글이라는 기록이 있고, 그 옆의 글들은 ‘광제암문’ 네 글자의 필력에 미치지 못한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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