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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3> 어머니 위해 상연대 짓다

‘장수의 별’(노인성) 못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상연대서 술잔 올려 추모하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9-20 19:13:23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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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뜻 방 내준 약초꾼 부부 위해
- 소나무에 ‘인백기천’ 그려 선물
- 연잎밥 도시락에 철편으로 보답

- 세 번 보게 되면 장수한다는 별
- 어머니 생전에 보여드리려 지은
- 함양 백운산 자락 암자로 향해

- 자식 탓 마음 고생하신 어머니
- 치원, 생명이 곧 업보인가 생각
- 낮은 곳의 백성 위한 행보 다짐

■화폐가 없으니 대신 철편으로 사례

   
함양 백전면 백운산 자락 해발 850m 지점에 자리한 상연대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정면 천왕봉을 위시한 지리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 무렵 노인성을 볼 수 있었다고 전해온다. 사진작가 고귀웅 제공
새벽, 눈을 뜬 치원은 벼루에 먹을 간 뒤 잠시 생각하다 작은 종이를 꺼내 뭔가를 그리고 쓴다. 귀한 산삼주보다도 환란 중에도 선뜻 하룻밤 묵을 방을 내어준 선한 마음을 지닌 부부의 앞날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부(富)를 기원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부는 화(禍)를 부를 수도 있으니 건강한 장수를 기원하며 소나무에 ‘인백기천(人百己千)’ 네 글자를 더했다. ‘인백기천’은 당나라에서 과거를 준비하며 ‘다른 이가 백만큼 노력할 때 나는 천을 한다’는 각오로 마음에 새긴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그 마음의 노력이 행운을 불러준 것이니 가난한 부부에게 부적이 되라는 뜻이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조용한 부부의 방을 향해 목례로 인사한 치원은 무영과 함께 걸음을 서둔다. 갈 길이 멀지만 걸음은 먼저 대관림을 향한다. 새벽 여명에 다시 보니 몇 년 사이에 산에서 캐다 심은 나무들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 우뚝 자란 데다 꽃은 종류가 더욱 다양해졌으니 흐뭇하다. 어머님이 살아계셔 다시 이 숲을 거닐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니 그 빈자리의 허전함이 더욱 크다.

바쁘게 다가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신세를 졌던 그 부부다. “조용히 조반을 준비한다고 이웃집을 다녀온 것인데, 어서 돌아가셔서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 “아닐세, 내 갈 길이 바쁘네. 마음만으로도 고맙네.” 치원의 손사래에 그의 안해가 연잎으로 싼 작은 덩어리를 내민다. “그러실 것 같아 나물 넣은 밥이지만 한 덩이 쌌습니다. 가시는 길에 요기하십시오.” 안해에 이어 사내는 토기 주병 하나를 내민다. “대접이 소홀하여 너무 송구했습니다. 어제 그 산삼주를 담아봤으니 주무시기 전에 한 잔씩 드십시오.” 생각하는 바가 있어 사양하지 않고 받지만 치원은 마음이 무겁다.

신라는 아직 당과 달리 따로 화폐가 없어 포목, 쌀 등의 현물을 거래 수단으로 쓰니 길을 나서면 값을 치르거나 사례를 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무영을 돌아보니 벌써 걸머멘 바랑을 벗어 뭔가를 꺼내고 있다. 철편(鐵片)이다. 옛 가야 이후 남쪽 지역에는 쇠를 다루는 곳이 많으니 큰 거래에는 덩이쇠를, 사소한 값을 치르는 데는 철편을 쓰기도 하는데 아직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받느니 마느니 실랑이가 있었지만 무영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치원은 비로소 마음의 부담을 던다.

■세 번 보면 백수 누린다면 노인성

   
치원은 천령(현 함양) 관아에서 서북 백운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태수로 재임할 때 어머니께서 문득 노인성(老人星)을 한 번 봤으면 하는 말씀을 꺼낸 적이 있다. 늦가을과 겨울 무렵 남쪽 하늘에서 볼 수 있고,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이라 하는데도 그 자리가 땅과 가까운 낮은 위치라 신라에서는 관찰이 쉽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노인성이 보이면 나라에 고하도록 하고 경사스러운 징조로 여겼을까. 민간에서 노인성이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 세 번을 보면 백수 한다는 이야기가 도는 것도 아마 그런 연유이리라.

바다 건너 남쪽 탐라국 섬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별을 보러 타국에 갈 수도 없지 않은가. 치원 역시 어머니의 장수가 큰 소망이었으니 천령에서 남쪽하늘을 관찰하기 가장 좋은 상연대(上蓮臺)에 암자를 짓도록 사재를 내 사람을 보낸 바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부성군(현 충남 서산시) 태수로 부임하게 되니 완공도 보지 못했다.

‘건강백세’ ‘행복’ ‘합격’의 상징물에 ‘인백기천’을 더했다. 마음에 부적으로 삼으면 쉬이 포기하지 않을 듯하다
숨이 턱에 찰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오르니 이번에는 직각에 가까운 더 가파른 기슭이 가로막고 있다. 고개를 드니 위쪽에 암자 지붕이 처마까지만 겨우 보인다. 숨을 고르고 다시 걸음을 내디뎌 기슭을 오르니 상연대다. 작은 암자 앞 좁은 마당 아래쪽에 땅속을 흐른 물길을 받는 돌샘이 보인다. 몇 걸음 내려가 표주박 가득 물을 떠 목을 적시니 그대로 감로수다. 무영도 흐르는 땀을 훔치고 목을 적신다.

인기척에 뒤늦게 스님과 함께 법당에서 나오는 처사는 암자 짓는 일을 맡긴 사람이다. “태수님, 이제야 오셨습니다!” 반기는 그의 소개로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남쪽 방향을 물어 바라보니 지리의 주봉 천왕봉을 위시하여 좌우에 줄지어 선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원이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처사는 노인성을 보았소?” “예, 재작년 겨울, 하늘이 아주 청명했던 날 한 번 보았습니다.” “어떠했소?” “아주 선명했는데 붉은 기운을 띠었습디다.”

하늘의 별자리 중 용골자리에 드는 노인성은 하늘에서 태양을 제외하고는 시리우스에 이어 두 번째 밝은 별이다. 지평선 낮게 떠있을 땐 대기효과로 붉은 기운이 강하게 나타난다.

■업 짓는 게 삶이라면 선업 쌓으리라

   
어머니께 노인성을 보여 드리기 위해 최치원이 사재로 지은 암자인 상연대. 함양군 제공
치원은 어머니 위패를 법당에 안치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다. 어머니 생전에 암자가 지어졌더라도 노인성을 볼 수 있게 모시지는 못했을 듯싶다. 산이 이처럼 가파른 데다 그 별을 볼 수 있는 계절에는 눈이 쌓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어리석었다 생각하지 않는다.

시(時)를 맞추었으면 기쁘고 흡족한 마음은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자식의 마음에 대한 연민으로 안쓰러움 또한 일었을 테니 명(命)과는 무관했으리라. 그저 살아생전 매 순간 소홀하지 않아 마음 씀을 적게 하는 것이 참된 효일 텐데 아무래도 부족함이 더 많았던 듯하다. 과함은 과한대로, 모자람은 모자란 대로 불민(不敏)하게 되니 생명을 얻은 것 자체가 업보인가 생각도 든다. 후회가 거기에 미치니 불가에서 윤회의 업을 끊어 부처가 되라는 가르침의 깊이가 새롭다.

치원은 무영을 불러 아침에 받은 주병을 꺼내 잔에 술을 따르게 한다. 어머니 위패 앞에 잔을 올리고 재배(再拜)한 치원이 스님을 돌아본다.

“도량에 술 향을 풍겨 송구하오. 지리산 정기를 품은 산삼으로 담았다니 혼이 흠향(歆饗)하실는지 알 수 없으나 어머니께 마음은 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스님은 빙그레 웃음 짓는다. “산의 정기를 담은 향이니 꼭 술이라 할 수도 없겠습니다.” “고맙소. 내 이 주병을 두고 갈 테니 기운 좋은 날에 한 잔씩 올려주시면 고맙겠소.”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니 무영은 주병을 위패 아래에 놓아둔다.

그날 밤, 치원은 내내 위패 앞을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모자람의 죄를 자책해도 용서받을 수 없고, 다시 뵙는다 해도 모자람은 여전할 테니 그저 추모하며 그리워할 뿐이다. 새벽예불에 들었던 스님이 목탁을 내려놓자 치원도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선다. 업으로 태어나 또 업을 짓는 것이 삶이라면 선업(善業)을 쌓으리라.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낮은 곳의 백성을 위해, 가여운 모두를 위해….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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