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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4> 합천 가야산 해인사 들다

해인사 학사대서 수행 결기… 지팡이 꽂고 “학문 전념 땐 자라날 것”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09-27 19:21:49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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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이 어우러진 가야산 해인사
- 친형 현준과 벗 정현스님 만나
- “산에 들면 안 돌아오리” 시 읊어

- 도적 막다 목숨 잃은 승려 기린
- ‘묘길상탑’엔 최치원 비문 봉안

- 화엄학 학승들 뜻 분열에 씁쓸
- 무엇을 공부할지 명료히 못 해
- 우선 산 일대 두루 돌아보기로

   
머리에 흰구름을 인 가야산은 모든 것이 저마다 빼어나면서도 서로 불거지지 않고 화합한다. 화엄의 도량 해인사가 이곳 가야산에 든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리라. 합천군 제공
■결연한 의지로 입산시 읊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힘차다. 그럼에도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바람소리까지 선명하다.

모든 것이 제 빛깔, 제 소리를 또렷이 하지만 높고 낮고, 크고 작음으로 서로를 가리지 않는다. 해인사는 그런 가야산 자락에 애장왕 3년(802년) 의상대사의 법손 순응과 이정 두 승려가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했다. 불가의 삼보(三寶)인 승(僧)·불(佛)·법(法) 중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대승경전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이름을 얻었다.

치원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바쁜 국사의 와중에도 몇 차례 해인사를 다녀갔다. 무엇보다 모형(母兄)인 현준(賢俊)이 오래전부터 몸담고 있는 데다 그의 도반인 정현(定玄) 스님과도 더불어 도우가 되었으니 마음의 고향 같았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가야산은 모든 것이 저마다 빼어나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불거지는 불화가 없으니 화엄의 도량으로는 더 없는 터이지 싶다.

아직 일주문이 한참 남았는데 길 위쪽에서 산책하듯 소요하는 걸음으로 내려오는 승려 둘의 모습이 보인다. 같은 잿빛 승복에 모두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싶은데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며 한 승려가 손을 들어 흔든다. “고운!” 정현의 목소리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니 옆의 승려는 모형인 것도 알게 된다. 치원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빨리한다.

“누군가 올 것 같아 나왔는데 과연 고운 자네군!” 덥석 치원의 두 손을 잡으며 정현이 반긴다. 치원은 손을 잡힌 채로 뒤쪽의 현준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마중을 나오신 겁니까?” 현준은 양손을 합장하며 고개 숙인다. “그래, 세상은 좀 돌아보았는가. 어떻던가?” “한때 관리였다는 것이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백성의 삶이 너무 피폐하고, 무엇보다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현준은 한숨을 내쉬는데 정현은 혀를 찬다. “그러니 조정에서 버틸 것이지 산문(山門)에는 왜 들어. 뭐, 다시 나가면 되는 일이니 일단 좀 쉬며 생각을 다듬게.”

하지만 치원은 고개를 저으며 시 한 수로 답을 대신한다.

‘저 중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 /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 저 뒷날 내 자취 두고 보게나 / 한 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노산 이은상 역. 증산승(贈山僧·어느 산승에게)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입산시(入山詩)로도 불린다.

■치원 비문 봉안한 묘길상탑

   
묘길상탑. 신라 말 혼란 속에 도적떼에 맞서 병장기를 들어야 했던 승려들의 원혼을 위로하려 세웠다.
일주문이 멀지 않은 길 오른편에 전에 보이지 않던 작은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두 승려가 그 앞에 걸음을 멈춘다. “묘길상탑일세.” 치원은 합장하고 세 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다. 절집에까지 미친 군도(群盜)의 약탈을 막다 목숨을 잃은 승군들을 기려 세운 탑이고 치원이 그 탑기(妙吉祥塔記)를 써준 바 있다.(최치원 시리즈 19 해운대 편 참조)

“자네가 지어 보내준 탑기는 전판(塼板)에 탑지(塔誌)로 새겨 사리장엄구와 같이 탑 안에 봉안했네.” “사상자가 많았습니까?” 정현은 새삼 진저리를 치고 현준은 깊은 한숨 뒤에 혀를 찬다. “떼도둑이 된 그들의 절박함은 안타깝지만 절집에 쳐들어와 승려의 목숨까지 위협하려 드니 어쩔 수 없이 병장기를 들어야 했지. 그렇지만 불제자의 처지로 병장기를 들었으니…. 승훈(僧訓)스님께서 발원한 까닭일세.” 승훈은 나라에서 특별히 뽑은 별대덕(別大德)으로 해인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뒷날 현준 또한 별대덕이 되었는데 의상대사의 법맥을 잇고 법장(法藏)을 흠모하며 화엄학에 밝았는데, 희랑화상(希郞和尙)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치원도 천령군(현 함양군) 태수 재임 당시 희랑의 화엄경 강론에 초청받고도 참석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시 10수를 지어 보낸 바 있었다.(최치원 시리즈 14, 함양군 편 참조)

■학사대 지어 공부처로 삼게 하다

   
묘길상탑 사리구 탑지(왼쪽)와 사리병(가운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전판에 새긴 것. 도굴된 것이 1970년 발견돼 역사 기록이 확인된 별난 인연이 있다.
대적광전(옛 비로전)에 들어 배(拜)를 올린 치원과 무영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두 승려는 대적광전 바로 옆 작은 언덕 위로 오른다. 현준이 치원을 돌아보며 “이곳에 자네를 위한 작은 정자를 지어 ‘학사대(學士臺)’라 할 테니 공부처로 삼게” 한다. 치원은 옆 대적광전을 돌아보며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물으니 현준은 “가야산에 든 뜻은 불도를 공부하기 위함일 텐데 부처님도 반기시겠지” 한다. “암요, 우리도 같이 공부하면 서로 보완이 될 테지요.” 정현의 말에 치원은 주변을 돌아보다 서너 발짝 떨어진 언덕으로 올라가 가지고 다니던 소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꽂는다. “공부가 바르게 이루어지면 이 지팡이가 생명을 얻어 자라게 될 것입니다.” 정현이 그 말을 받는다. “입산시도 그렇고 수식노회(手植老檜)까지! 결기가 대단하네, 하하.” 수식노회는 자리에서 물러난 이가 직접 나무를 심어 새로운 뜻을 밝히고 다지는 뜻이기도 하다.

현준이 묻는다. “무엇을 공부하려 함인가?” 그러나 치원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을 뿐이다. 자신도 아직까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 보살이 무영이겠군?” 정현이 뒤늦게 눈길을 주자 무영은 합장해 허리를 굽힌다. “부친을 만났었네. 자네 무예의 근기가 대단하다지?” 무영은 손사래 친다. “아닙니다, 부끄럽습니다.” 정현의 얼굴에 장난기가 돈다. “해인사 호법승들에게도 한 수 가르쳐주시게.” 무영이 기함하며 두 손을 내젓자 정현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내가 너무 짓궂었나. 아무튼 세운 뜻이 굳다니 앞으로 바쁘시겠네.” 무영은 선선히 고개를 숙인다. “송구합니다.” 현준이 나선다. “인연이 그러한 모양이네. 고운이 가야산에 머무는 동안 안위는 우리가 지킬 테니 일이 있으면 편히 나다니게.”

   
치원은 묻고 듣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안다. 화엄학의 학승들도 이미 북악(北岳)과 남악(南岳)으로 나누어져 북쪽과 남쪽 반군에 각각 뜻을 두고 있으니 해인사는 남악으로 희랑이 그 중심에 있었다. 치원이 안타깝고 뜻을 명료히 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런 갈라짐 때문이었다.

“며칠 쉬고 나서 가야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싶습니다.” 치원의 말에 정현은 현준을 돌아본다. “이 사람 너무 무심하지 않습니까. 여태 안해며 식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치원이 뒤늦게 민망한 낯빛이 되자 현준은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염려 말게. 조용한 곳에 거처를 마련했네. 살림은 해인사에서 뒷바라지 할 것이니 자네는 뜻을 세워 정진하게.”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정현이 나서자 현준이 막는다. “아닐세. 출가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모처럼 형제로서 밥상이라도 마주해야겠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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