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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5> 가야산 골짜기서 안해 해후

가야산 깊은 곳서 만난 아내 “품은 뜻 꺾지 말되, 술 줄여주오” 당부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0-04 19:42:34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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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군들 눈 피해 은둔한 식구들
- 어둠속 산기슭서 오랜만에 마주
- 푸성귀·절인 고기 등 밥상 차려
- 스님인 형과 가족으로서 술 한잔

- 차별 없이 만물 포용하는 북쪽
- 무영 그곳에 뜻 두고 길 나서자
- 아내 “다독여주오” 치원에 부탁
- 고귀함 못 좇는 권력 한심해져

■저녁 찬거리 준비하다 허리 펴다

   
최치원의 식솔은 가야산속 깊은 곳에 초막을 지어 은둔했다. 지금의 해인사 산내암자 고운암은 옛적 그 터에 세운 암자이다. 해인사 제공
현준은 해인사 일주문을 나선다. 치원은 마을 어디에 집을 마련했나 생각하며 따랐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는 즈음에서 홍류천을 건너 가야천 줄기를 거스른다. 인가가 끊어진 후 한참을 더 가더니 이번에는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산길을 오른다. 깊은 산중이라 해가 일찍 저물기는 하지만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해인사를 나와 두 시간은 걸은 듯하다.

“산이 깊지?” 현준의 말투가 모처럼 가형(家兄)의 그것이다. “예, 찾기도 쉽지 않고 쉬이 나다닐 엄두도 못 낼 듯싶습니다.” “그래서네. 아는 몇 사람 말고는 누구도 찾을 수 없어야 하니.” “까닭이 있습니까?”

“북악(北岳)의 희랑(希郞)과 남악(南岳)의 관혜(觀惠)가 모두 해인사에 있지 않은가. 알게 모르게 북쪽과 남쪽 사람들이 드나드는 듯싶네. 자네야 우리가 지킨다지만 가솔을 절집에 기거하게 할 수 없으니 드러나면 인질이 되기 십상이지 않은가.” “도량에 들어서 어찌 세속의 일에 편을 드는 것인지.” 현준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만 바른 나라를 기대하는 마음이니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답답할 뿐이네.”

빠르게 내려앉는 어둠 속 산기슭에 작은 초막이 보이자 무영은 앞서서 걸음을 서둔다. 치원이 주위를 둘러보니 삼면이 산에 둘러싸여 갇힌 듯하지만 제법 안온한 지세(地勢)여서 은둔하는 삶에 맞춤하다. “대부인!” 집 마당 아래쪽을 향한 무영의 소리에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이는 치원의 안해다. 텃밭에서 저녁 찬거리를 뜯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걸음에 밭을 나와 길 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막상 치원을 향해서는 반가운 기색도 못하고 현준에게 합장의 예를 표한다.

치원이 성큼 다가가 두 손을 잡자 그제서야 “고생 많으셨습니다”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는 얼른 밭으로 내려간다. 저녁상 준비할 마음이 급한 것이다.

무영이 그 뒤를 따르자 현준과 치원은 집을 향한다.

■된장에 고기 절여 보관하던 신라

   
무영까지 거들더니 바쁘게 차린 밥상이 풍성하다. 다른 식솔은 옆방에 상을 차리고 안방에는 치원 부부와 현준, 무영이 둘러앉는다. 산중 살림에 채소뿐이지만 부침개가 곁들여지니 고소한 냄새가 번진다. 사내 둘이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젓가락을 드는데 안해는 현준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린다. 금방 알아차린 현준이 빙긋 웃는다. “괜찮습니다. 긴 여정에 고생이 컸을 테니 기름진 음식도, 술도 있어야겠지요.” 비로소 안해는 민망한 표정으로 상 아래 두었던 접시 하나와 술병을 올린다. 접시에는 삶은 육고기가 푸짐하게 담겨있다. “산중에서 고기를 어찌 구하신겁니까?” 치원의 물음에 안해는 무영을 돌아본다. “지난번 함께 와주셨던 무영의 부친인 만호께서 노루와 새를 잡아와 염장보다는 짜지 않고 냄새도 잡아준다며 장지(醬豉·된장)에 해(醢·절임)를 담아주었습니다.” 무영이 거든다. “생선은 빨리 상하니 염장을 하지만 육고기는 장지에 절이는 것이 풍미도 좋습니다.” 치원은 눈에 선한 만호를 대신해 무영에게 치사하고 잔을 들어 현준에게 내민다. “오늘은 가형이시니 한 잔 하시지요.” 현준은 빙긋 웃으며 잔을 받는다. “곡차로 여기고 받겠네만 고기는 권하지 말게.” 잔을 비운 현준은 배추전을 집고 치원은 노루수육을 맛본다.

“오, 장지의 간이 어우러져 아주 맛납니다. 부인도 맛보시고 무영이 자네도 들게.” 잔이 돌고 정겨운 담소가 이어지는 저녁상이 모두를 푸근하게 한다.

“고운은 이제 출사의 뜻이 없는 듯싶습니다. 양식과 찬거리는 절에서 제때 부족하지 않게 보낼 것입니다.” “양식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텃밭을 일구고 있으니 찬거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텃밭에서야 제철 푸성귀는 얻을 수 있겠지만 해인사는 살림이 큽니다. 장(간장)이며 장지, 말린 나물 등속으로 사계절을 넉넉하게 준비하니 마음 쓰지 않아도 됩니다.”

현준은 다시 치원을 돌아본다. “우선 좀 쉬고 해인사로 오시게. 독서당은 내일부터 시작하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제 공부도 해야겠지만 나라의 앞날을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마음일세. 관리들과 상의해 서당을 짓도록 해보겠네.” 이번에는 무영을 돌아본다. “보살은 달리 할 일이 있으신가?” “예, 내일 길을 나서 어딜 좀 다녀오겠습니다.” “북쪽인가?” 무영은 답이 없다. “왜 그쪽에 뜻을 둔 것인가? 어느 쪽도 그리 밝지만은 않은 듯싶던데.” 이번에는 답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빛이 보일 겁니다.” “빛?” “예, 예전의 신라처럼 널리 문을 열어 교역하며 구분과 차이를 두지 않고 포용하는 이가 있습니다. 맑은 불심까지 깊으니 분명 새 세상을 열 것입니다.” 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인양 “문을 열고 포용이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신라는 누런 나뭇잎 고려는 푸른 소나무)인가” 중얼거린다.
   
지난해 태풍 ‘링링’으로 쓰러지기 전 천연기념물 제541호였던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왼쪽), 쓰러진 후 남은 나무 밑둥(가운데), 현재 보존 처리 중이다(오른쪽). 원래 최치원은 소나무 지팡이를 꽂았지만 조선시대 고사해 전나무를 심었다 전해온다. 해인사 측은 현재 다시 전나무 식재를 준비 중이다.
■술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는 안해

부윰하게 스며드는 여명의 기운에 방문을 여니 부슬거리는 빗줄기가 산중을 적신다. 현준과 무영은 저녁상을 물리자 이내 아이방과 아낙방으로 들었고 치원은 안해와 마주해 술잔을 기울였다.

긴 유랑 끝에 식솔 곁으로 돌아오니 비로소 세상과 등을 졌다는 것이 절실하다. 아쉬움은 일말도 없지만 아직 구체적이지 않은 앞일과 무엇보다 가장이라는 무게가 마음을 짓눌러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술잔만 비우다가 새벽을 맞았다.

“여태 좋은 가장이 되어주지 못했는데 앞으로도 약속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곁을 지킬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심려 마시고 품은 뜻을 꺾지 마십시오.” “세상일에 나가지는 않겠지만 집을 비우는 날이 잦을 겁니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디를 나다니시든 술을 너무 가까이는 마십시오.”

안해의 염려에 치원은 쓴웃음을 짓는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데다 안타까운 세상 흐름이 더욱 술을 찾게 하니 어쩌겠는가. “만호 어른께 무영 낭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신의 안일보다 사람의 고귀함을 좇는 마음은 저도 같지만 나서는 용기는 낭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너무 마르게 마시고 더러 따뜻하게 어깨라도 다독여주십시오.” 무영을 위한 부탁이다. 뜻이 같으면 그렇게도 정을 나누는 것인데 권력은 어찌 아녀자의 속만도 못한 것인지 한심하다. 치원은 문득 시 한 수를 읊는다.

‘흘러가는 저 물은 돌아 못 오고 / 봄빛만 사람을 괴롭히누나 / 애틋한 아침 비 부슬거리고 / 꽃들은 피고 맺고 저리 곱구나 / 난리 때라 좋은 경치 주인이 없고 / 뜬세상 명리도 쓸데없는 것 / 아내는 원망스레 소매 붙들고 / 구태 어이 술잔 자주 못 들게 하나.’(춘효·春曉·봄새벽, 노산 이은상 역).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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