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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6> 불가와 천생의 인연, 가야산

유·불·도 통합 뜻 품은 치원…희랑 "만물 하나된 세상이 곧 화엄" 강조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10-11 18:52:0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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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제일봉 수행 도량 ‘청량암’
- 북쪽 등지는 용맹한 기세 감탄

- 화엄경 지혜 빼어난 희랑스님
- “분열되는 신라 하나로 만들어
- 백성 도탄서 건져낼 방편” 강조
- 자신이 공부하던 경전 등 건네

오랫만에 찾은 안해가 있는 가야산속 초막. 그날도 안해와 술잔을 기울이다 새벽녘 길을 나선다. 소로를 따라 이리저리 오르락내리락 끝에 마침내 능선에 올라선다. 친형 현준과 도반 정현이 먼저와 기다린다. 이들은 건너편 마주한 가야산 산세를 찬찬히 살핀다. 가야산이라는 이름은 예전 대가야국의 땅이었기에 그에서 비롯됐다고도 하고, 천축국(인도) 부다가야 인근의 부처님 설법처인 가야산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가야산 정상부가 소머리 형상인 데다 예전 산신제 공물로 소를 바쳐 우두(牛頭)산이라 불렀는데 불교가 전래되고 범어(梵語)의 ‘가야’가 ‘소(牛)’를 뜻함을 알게 되니 불가와는 인연이라 할 만하다. 산세도 홍류동계곡 쪽 출구 외에는 연봉과 능선이 모두 급사면을 형성하니 그 안은 마치 사대천왕, 팔대천왕이 엄중히 호위하여 처음부터 법보종찰 터로 정해진 듯하다.
   
시퍼런 칼날 같은 기운을 품은 청량사.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법당의 석불과 석등, 석탑이 일직선으로 가야산 출구를 향한다. 3점 모두 보물이다. 합천군 제공
남산제일봉에서 홍류동계곡 쪽으로 내려오다 보니 산 중턱에 암자가 있다. 역시 급사면인 산 중턱에 축대를 쌓아 절터를 마련하고 암자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다. 얼핏 봐도 마당의 석등과 석탑이 암자 정중앙에서 남쪽을 향해 일자로 조성했다. 전에 본 바 없는 경우다.

“저기 암자가 있군요.” 치원의 말에 정현이 나선다. “청량암일세.” “해인사와는 지세가 다르지만 좋아 보입니다.” 이번에는 현준이 말을 받는다. “본사(本寺)는 대가람이니 그에 합당한 터여야 하고, 청량암은 수행과 공부하는 도량이니 지세가 달라야지 않겠나.” “지금까지 다녀본 어떤 도량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입니다. 뒷산을 물러설 수 없는 배수처럼 여기고 동남으로 난 유일한 출구까지 단번에 뛰어넘기 위한 용맹정진의 엄한 기세가 시퍼런, 그런 기운입니다.”

현준과 정현은 새삼스레 청량암과 주변을 돌아본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새롭기는 하네. 그렇지 않아도 들를 생각이었으니 서두세.”
   
청량사 석조석가불좌상과 석등. 석조석가불좌상은 석굴암 석조불상과 같은 양식이다.
■시퍼런 칼날 같은 기운, 청량암 터

법당 좌우에 각각 작은 요사채가 있다. 한쪽은 주지승의 종무실일 테고 다른 쪽은 공부하는 방일 게다. 단정하고 엄숙하다. 직각으로 쌓아올린 석축 아래쪽에 산문(山門)인 누각이 있고 그 곁에 공양간이며 해우소가 있으니 법당 쪽은 오직 수행 도량으로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다. 법당 안 중앙에 석조석가불좌상이 봉안돼 있는데 과연 불상과 석등, 삼층석탑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지향하는 끝은 가야산 유일한 출구, 그곳이다.

“석불은 석굴암 불상을 빼닮았습니다.” “우리도 같은 생각일세. 처음 불상을 본 순간 여간 공력을 기울인 것이 아닌 것을 알았네.” “오는 중에 자네가 한 말을 듣고 눈을 밝게 해 다시 보니 과연 기세가 시퍼렀네. 사형(師兄), 저도 진작 여기에 들어 공부했으면 돌중 소리는 면했겠습니다.” “이제라도 아둔한 걸 깨쳤다니 다행일세.” “예! 아니 사형 그렇다고 정말, 하하.” 현준과 정현이 객쩍은 소리를 주고받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현준 스님과 정현 스님이 예까지 어쩐 걸음이십니까?” 돌아보니 청량암 주지다. 합장 후 정현이 고운을 소개한다. “인사 나누십시오, 그 유명한 고운입니다.” 주지는 깜짝 놀라 합장하며 급히 허리 숙인다. “한 번이라도 꼭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뵙는군요.” “이곳 기운이 시퍼렇게 날 선 칼처럼 엄합니다.” “예, 희랑도 그리 말하며 자주 들러 저쪽 요사채에서 며칠씩 정진하고 갑니다.” “희랑이요?” 처음 듣는지 정현은 현준을 돌아보지만 그도 같은 기색이다. “아니, 저는 그렇다 해도 스승이나 다름없는 현준 스님도 모르셨습니까. 이런 괘씸한!” “하하, 어제 공부하던 경전들을 두고 나갔으니 아마 곧 돌아올 겁니다. 제 방에서 차나 드시지요.” 주지는 종무실을 향해 앞장선다.

‘마갈제성에서 광명 두루 비추었고 / 차구반국에서 불법 더욱 빛났네 / 오늘 아침 지혜의 해가 부상에서 나왔으니 / 문수보살이 동묘에 강림했음을 알았네.’

치원이 천령(함양군)태수로 재임할 때 희랑의 화엄경 강론에 참석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지어 보낸 ‘증(贈)희랑화상’ 10수 중의 한 구절이다.

마갈제성(磨羯提城)은 석가모니께서 도를 깨친 곳이고, 차구반국(遮拘盤國)은 자주 설법한 곳이다. 이어 희랑을 ‘지혜의 해’로, 부상(해 뜨는 동쪽)에 나왔다고 했으니 지혜의 표상 문수보살에 비유하며 칭송한 것이다.

■모든 부처·만법 하나 되는 화엄세상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지는 건칠 희랑대사 좌상. 최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지정이 예고됐다.
희랑은 치원을 보자 절을 하듯 크게 허리를 굽히고 반갑게 양손을 맞잡는다. “몇 년 전 보내주신 시는 저를 몸 둘 바 모르게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붓을 내려놓으면 언제나 부끄럽지만 외면하고 보내고는 합니다.” “예, 저를 부끄럽게 하셨지요.” “치원이 자네에게 시를 보냈던가?” 끼어드는 정현에게 희랑은 민망한 얼굴로 답한다. “저를 문수보살에 비견하셨으니 고운 선생께서 잘못 지으신 거지요. 현준 사형 뵙기가 송구해 감췄습니다.” 현준이 나선다. “맞네. 자네의 지혜면 문수보살이라 할 만하지.”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아직도 사형께 배울 것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 청량암에 들어와 공부하는 것도 사형께 듣고 배운 걸 정리하여 제 것으로 하기 위해섭니다.”

인사와 치사가 끝나고 희랑은 치원이 은거하며 품은 뜻을 듣는다. 유학으로는 신라에서 비견할 자가 없고 도학에도 해박한 고운은 불학에도 밝았다. 그런 고운이 이제 불학, 특히 화엄학을 깊이 공부하려는 것은 유·불·도를 아울러 새로운 도를 만들겠다는 것이니 그 포부에 기가 눌리고 역량은 부럽다. “예, 고운 선생이라면 마땅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희랑대사의 지도와 편달이 필요합니다.” “제가 무슨. 아무튼 건너편 요사채에 제가 공부하던 경전과 서책을 그대로 두겠습니다. 저는 이제 걸음하지 않을 테니 서재로 쓰시고, 학사대가 지어지면 거기서 말씀 나눕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대사 같은 당치 않은 호칭은 거두시고 말씀을 편히 해주십시오.”

   

치원은 잠시 생각한다. 불학, 특히 화엄은 문자는 어렵고 논리는 난해하다. 왕실과 귀족의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고 백성은 그저 기복(祈福)이나 할 뿐이니 불만세력은 선종을 찾는다. 새로운 도가 무엇이든 학문에 밝지 않은 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만백성을 하나로 할 수 있고 나라의 중심이 된다. “희랑, 화엄을 귀 어두운 백성도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말로 하면 무엇이오?” 희랑이 현준을 돌아보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희랑은 치원을 정시한다. “우주의 모든 부처와 만 가지 법이 하나가 되는 세상을 화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천축에서 서국(중국)을 통해 전래되며 문자와 문장이 어려워졌습니다. 공부하시는 중에 하동 칠불암을 한 번 찾아보십시오. 가락국 허왕후로부터 전래된 본래의 불성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화엄도 그 본성을 잊어 왕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갈라지는 나라를 하나로 해야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낼 수 있으니 방편으로 삼을 밖에요.”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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