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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8> 치원, 신선으로 유람하다

질박과 절제 정신으로,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진리탐구 다짐하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0-25 19:49:3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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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종 등 불교계 길 달리하지만
- 그 끝 모두 중생 구제하려 하니
- 열반보단 신선 되고싶다 생각

- 금오산 청정 기운·엄중한 기상
- 고요한 바람 맞으며 가부좌 명상
- 마치 신선된 듯 평화·자유 만끽

- 쌍계사 인근서 본 진감선사부도
- 문득 불가 정신에 대해 깨우쳐

물질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 느낌, 생각과 지어감, 의식 또한 그러하니라.
그 옛날 신선이 구름을 탄 모습을 상상한다면 오늘날 짚와이어를 타고 신선이 되어 점점이 박혀 있는 다도해를 포함한 한려해상 국립공원을 가슴에 담을 수 있을 듯하다. 사진은 하동 금오산 짚와이어 활강 모습. 하동군 제공
■불가·도가의 근본은 다르지 않아

칠불암 산문을 나서고도 치원은 행로를 정하지 못한다. 쌍계사를 찾아 선종(禪宗)을 논해볼까 생각도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을 듯싶다. 교종이니 선종이니, 대승이니 소승이니, 남악이니 북악이니 길을 달리하지만 그 끝은 모두 석가의 가르침을 따라 중생을 구제하려 함이다. 개중에 왕실, 귀족, 부자 등의 세속에 치우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부이거나 방편일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에 현상일 수 있다’는 ‘반야심경’의 구절이다. 마치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놀다 깨니 자신이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말한 ‘호접몽(胡蝶夢·나비의 꿈)’을 연상케 한다. 얼핏 허무(虛無)를 말하는 것 같지만 반야심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공’은 각자 본래의 마음으로 걸림이나 공포, 교만 없이 맑고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마음으로 부정을 넘어 대긍정으로 가라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또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유(有)’, 다시 ‘무’로 순환되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자는 것이니 불가나 도가의 근본이나 지향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문득 윤회의 업을 끊어 열반에 들기보다 신선이 되어 영원히 소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치원은 자신의 엉뚱함에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진작부터 가보고 싶던 금오산으로 길을 잡는다. 하동 남쪽 바다가와 면한 금오산에 오르면 푸른 다도해가 시원스레 한눈에 보인다니 가슴이 탁 트일는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한 곳으로 알려진 불일암과 진감국사부도. 불일폭포 가는 길에 모두 만날 수 있다.
■금오산서 본 다도해 풍광 감탄

바닷가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금오산이 제법 의연하다. 당나라는 국토가 넓은 만큼 명산도 많지만 그저 솟아있을 뿐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봉우리도 상당하다. 그러나 당에서 돌아와 느낀 바이지만 신라의 산은 하나같이 기상이 당당하다. 서국에선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白馬寺)를 비롯한 많은 절이 평지에 위치하지만 신라의 사찰 대부분은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청정한 기운과 엄중한 기상을 품어 따르기 위함이리라.

정상에 이르러 바다를 내려다보니 과연 옥빛 바다에 점점이 박힌 크고 작은 섬들이 그야말로 다도해다. 치원은 바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고요한 마음으로 하늘과 바다와 섬과 바람을 무연한 듯 지켜본다.

문득 두 팔을 펼치니 바람이 몸을 허공으로 이끈다. 구름이 다가와 푹신한 자리처럼 육신을 받쳐준다. 바람이 구름을 민다. 구름은 높은 허공에서 낮은 바다 위로 활강한다. 초록빛 싱싱한 섬에는 아이가 뛰어놀고 낮은 구름을 향해 개가 짖는다. 푸른 나무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생명의 숨을 쉰다. 섬들 사이 옥빛 바다에는 점점이 배가 떠 있다. 어부가 우렁차게 노래 부르며 그물을 당긴다. 살아있다. 살아간다. 모든 것이 산다. 평화다. 자유다. 영원이다….

무영은 가부좌한 치원이 너무 오랫동안 고요하자 조용히 불러본다. “선생님.” 답이 없다. 조금 크게 불러본다. 그래도 답이 없다. 가볍게 어깨를 건드려본다. 미동도 없다. 코밑에 손가락을 대본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슴이 철렁한다. “선생님!” “….” 눈앞이 아득해진다. 설마, 양 어깨를 잡아 크게 흔들어보지만 잠든 듯 그대로다. 어찌 이런 일이! 무영은 털썩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린다.

신선이 이런 것이라면 가봐야 할 데가 있다. 치원은 바람에게 돌아가자 말한다. 바람이 구름을 돌아가 거슬러 민다. 구름이 바위 위로 올라 육신을 내려놓는다. 바람이 구름을 떠받쳐 허공 멀리로 올라가자 울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무영이다. “왜, 무슨 일로?” 치원의 소리에 무영은 소스라치며 울음을 멈춘다. “괜찮으십니까? 잘못 되신 줄….” 알 것 같다. 정신이 몸을 빠져나가 놀았던 것이다. 치원은 빙긋 웃어 보이며 “너무 깊이 명상에 들었던 모양이네. 가볼 곳이 생겼으니 오늘은 화개까지 가야겠네” 하며 가볍게 몸을 일으킨다.

■산중 깊은 곳의 불일평전

객방을 나온 치원은 여각 주인에게 아침으로 갱조개국을 시킨다. 바닷물과 만나는 강 하구에서 잡혀 ‘강조개’라고도 불리는 재첩의 하동지역 사투리가 ‘갱조개’다. 재첩은 황산강(낙동강) 하구에서도 많이 잡히는데 예부터 ‘하룻밤 사이에 3대를 본다’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강장식으로 알려지고 특히 간에 좋다고 한다. 치원이 재첩국을 시킨 것은 어제 금오산에서 놀란 무영이 밤새 문 앞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에 몸을 보(補)해주려 함이다.

이번에는 치원이 무영에 앞선다. 무영에게 쌍계사는 초행이기도 하지만 절 마당으로 길을 잡으면 안면 있는 승려를 만나 번거로울 것 같아서다. 쌍계사 옆길로 산을 오르는 치원의 걸음이 가벼우니 무영은 걱정을 던다.

제법 가파른 산길을 중턱만큼 오르니 진감선사 부도(사리탑)가 보인다. 치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합장하여 예를 표한다. 돌이켜보면 불가의 근본과 정신은 진성왕의 명으로 진감국사대공탑비를 찬하며 이미 깨친 셈이다. 질박한 삶을 살며 절제를 잃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는 그 정신이면 충분한데 그간 문자에 묶여 허우적거렸으니 어리석음이다. 우연한 걸음이지만 이렇게 빈 마음으로 지나치다 문득 깨우치게 하니 참으로 큰스승이 아닌가.

다시 산을 오르던 치원이 걸음을 멈추고 무영을 돌아본다. 산 속에 편평한 마당이 밭처럼 펼쳐져 있다. 불일평전(佛日平田)이다. “어떤가?” 무영은 그저 어리둥절하다. “왜 이 깊은 산중에 이처럼 너른 밭이 자리했을까.” “글쎄요.” 치원이 별안간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공허함이 스며있지 않은 득의한 밝은 웃음이니, 처음이다.

웃음을 그친 치원이 자랑이라도 하듯 말한다. “이 골짜기가 무릉도원이면, 이만한 평전이면 신선 몇의 양식 밭으로는 넉넉하지 않겠나.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선이 은둔하여 바둑 두고 차 마실 터만 찾으면 될 테지. 또 가보세, 허허.” 무영은 황당하지만 내색 없이 뒤를 따른다.

길 위쪽에 작은 암자가 보인다. 불일암(佛日庵)이다. 진감국사께서 세웠으니 아마 공부처였으리라. 그리 성불하셨으니 또한 신선이지 않겠는가. 치원이 들어서지만 인기척은 없다. 스님이 마실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치원은 본 적 없는 그를 기리며 암자를 나온다.

이제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가갈수록 물소리가 우렁차다. 불일폭포다. 시원한 물소리에 흐르던 땀방울이 저절로 식는다. 이제 폭포로 내려가 보리라. 치원이 방향을 틀자 알아차린 무영이 앞장선다. 길이 너무 가파르다. 무영이 돌아보지만 치원은 내려가라 손짓하고 조심하라 이른다. 신선으로 머물려면 저쯤 어디라야 하지 않겠는가.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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