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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9> 홍류동계곡 서당과 원융

동국 신라 기운 이어받은 치원, 유·불·도 사상 아우를 큰 구상 밝히다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  |   입력 : 2020-11-01 19:40:50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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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에 들어 수행한 지 3년
- 학동·서생 유학 가르치며 유람
- 유·불·도 변질에 근심도 커져

- 해인사 선안주원 벽 한쪽에
- “신라 사람으로 그 기운 의지해
- 큰 뜻을 밝히겠다” 포부 적어

- 과거 선도에 관심많았던 현준
- 날선 기상 청량암 수련 제의
- 치원에 ‘원융 사상’ 완성 권해

세속을 떠나 가야산에 든 지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치원은 해인사의 모형(母兄) 현준이 관아와 상의해 세운 서당에서 유학(幼學)의 나이에 든(10세) 학동과 배움에 뜻을 둔 이들에게 유학(儒學)을 강론하며 수시로 지리산 자락을 유람했다. 유가·불가·도가에 신선사상까지 모두 인간을 구제하려 함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고 민생은 도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야산국립공원 내 가야산과 이웃한 매화산 남산제일봉은 그 기상이 벼린 칼날처럼 시퍼렇다. 수행에는 온화함과 엄격함이 함께해야 할 테니 해인사와 청량사가 대표적이다. 합천군 제공
유가의 정치는 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불가는 왕실과 권세에 기대 중생구제는 말뿐이다. 도가의 무위자연은 청정한 희망이 아니라 무기력한 절망의 씨앗이 되고, 신선사상은 허황한 비술로 혹세무민하니 무엇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나 답답하고 아득했다.

맑고 청정한 자연의 기운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바람소리, 물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의지하며 소요하는 사이 마음이 비워지고 마침내 그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스스로의 마음과 머리에 가득한 것들이 언제나 기준이 되었다. 그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니 탁한 면만 커져갔다. 익힌 지식에 기대 교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비우지 못하면서 기준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눈과 마음으로 다시 보니 처음과 시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오해와 세속의 욕망이라는 먼지가 본성을 완전히 덮은 줄 알았지만 가린 것은 겨우 티끌만큼이었다. 그 티끌에 메이고 집착했던 눈길을 거두니 맑고 빛나는 본성은 여전히 눈부셨다. 서생들이 모두 돌아간 서당에서 치원은 종이를 펼치고 붓에 먹을 적신다.

■해인사 선안주원 벽기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동방을 ‘이(夷)’라 한다. 후한의 문장가 범엽은 ‘‘이’는 뿌리라는 뜻이다. 어질어 살리기를 좋아하니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자란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여 도리로써 사람들을 인도한다’라 시작하여 ‘이아(爾雅·사전적 성격의 유교경전)’ ‘상서(尙書·중국 상고시대 정치를 기록한 경전으로 서경을 말한다)’ 등 사서의 글을 들어 ‘이’를 밝힌다. 이어 ‘그러므로 우리 대왕의 나라는 날(日)로 상승하고 달(月)로 왕성하여 물은 순조롭고 바람은 온화하니 어찌 깊숙이 겨울잠을 자던 것이 다시 떨치고 소생하는 것뿐이겠는가. 아마도 싹을 잡아당겨 무성히 자라도록 하니 생기고 변화하며, 생기고 변화하는 것이 진(震·동방)을 터전으로 하는 것이다’라 적는다. 이는 동국(東國·신라)의 사람으로 동국의 기운에 의지해 큰 뜻을 밝히겠다는 포부이리라.

‘위대하도다.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람이요, 사람이 근본(宗)으로 삼는 것은 도(道)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도가 높아진다면 사람은 저절로 귀하게 된다. 도를 자조(資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덕 있는 이를 존숭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가 높아지고 덕 있는 사람이 귀하게 될 것이니, 돌아보건대 법수(法首)라야 물정(物情)을 흡족하게 할 수 있고, 반드시 명칭을 바로 하고서야 대덕(大德)이라 일컫는다. 대덕이란 말은 도를 이름하여 대(大)라 하고, 덕이 이루어지면 윗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 해당하는 글의 시작으로 유가·불가의 경전과 ‘노자’ 등을 인용하여 사람의 존귀함과 도를 밝힌 것이니 유·불·도를 아우르는 큰 구상을 밝힌 것이다. 또 ‘가야산의 승경(勝境)은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잘 들어맞으며, 해인(海印)의 특별한 보배는 더욱 으뜸가는 보배의 가치를 빛냈다’하여 해인사의 근기를 당당하게 했다.

글을 마친 치원은 잠시 생각한 뒤 글머리에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 벽기(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라 써넣는다.

효공왕 4년(900년)이었고, 제목으로 미루어 당시 해인사에 있던 ‘선안주원’이라는 건물 벽에 적어두는 글이니 그곳을 중심도량으로 결기를 다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벽기는 사서에 전해지나 선안주원은 달리 기록이 없어 아쉽다.
   
최치원이 강론했다는 홍류동계곡 인근 가야서당과 근처의 제시석(오른쪽). 석벽 글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시는 고운의 작품이다.
■청량암서 仙道 일으키려는 현준

“참으로 대단한 배포일세. 유불선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것 아닌가!” 선안주원 벽에 쓴 기를 읽던 정현이 감탄하며 혀를 내두른다. “고운 선생이 아니시라면 누구도 품지 못할 큰 뜻입니다.” 희랑의 말에 치원은 고개를 젓는다. “아직 희랑을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혹 화엄은 어떨지 모르나 저는 유가와 도가는 아직 그 많은 경전의 일부만 일독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고운은 당에서 18년 동안 수많은 경전을 접했으니 감히 비할 바 아니지. 더군다나 입당 6년 만에 열여덟 나이로 장원급제한 수재 아닌가. 나로서는 이처럼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광영일세, 허허.”

선안주원에 들어 찻상을 마주하자 현준이 나선다. “그래, 대강은 잡은 것인가?” “그저 실마리나 붙잡고 있는 정도입니다.” “동국 만년의 기둥을 세우려는 것이라면 터의 기운에도 의지해야 하지 않겠나. 청량암에 자주 들게.” 현준의 말에 정현이 끼어든다. “사형은 어찌 청량암에 도반들을 들이는 것입니까? 불문에 든 승려들이 선도(仙道)를 기웃거려서야, 원.” 정현이 불만을 드러내자 희랑은 고개를 돌려 수심 깃든 낯빛을 감춘다.

현준은 치원에 앞서 입당해 교종과 선종을 두루 공부했다. 당은 개국 초기의 개방적 기풍이 사회 전반에 여전하여 불가다 도가다 서로 배척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도가도 깊이 공부했다. 귀국 후 의상대사를 효시로 하는 신라 화엄의 큰 맥을 이었지만 희랑이라는 걸출한 후학이 나타나자 짐을 내려놓듯 머리와 마음에 담았던 모든 것을 전하고 선도에 눈을 돌렸다.

“불문의 불자로서 내가 선도에 마음을 두니 모두가 괴이쩍고 불편해하는 것을 아네. 그렇지만 단약(丹藥)에 의지해 불로장생을 바라거나 신선으로 승천하는 따위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네. 오늘 도가는 현세의 발복이나 영생의 기이한 방술만 도드라지나 시작은 혼란하던 춘추시대 뭇 중생을 위하는 뜻이었네. 또한 자연과 합일을 말하는 그들의 뜻이 얼핏 진흥대왕 무렵 우리 화랑의 풍류와도 맥이 통하는 듯싶어 교종·선종과 더불어 선도를 수련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 것이네. 특히 청량암은 그 지기(地氣)가 날카로우니 화엄이나 선(禪)과 조화되지 않는 도반들의 수련에 적당할 것 같았고.” 그제야 정현과 희랑은 고개를 끄덕인다.

치원이 지향하는 바는 원융(圓融)이다. 무릇 법이라 칭해지는 것에는 모두 나름의 도가 있다. 그럼에도 도가 세상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것은 편벽함 때문이다. 가야산에는 해인사의 보배를 품는 기운이 푸근하고 이웃한 매화산 남산제일봉의 날선 기상은 청량암에 이어진다.

홍류동계곡의 청정한 물과 바람은 마음의 때를 씻고 정신을 맑게 해주니 원융의 사상을 완성하는 바른 눈을 지킬 수 있으리라.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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