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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0> 은둔 중 여러 글 쓰다

홍류동 옥수에는 차향이 배어나고, 바람결에는 숲향 그윽하니…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11-08 19:00:26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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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배하던 사람의 가르침 전하려
- 세속 떠난 뒤에도 불교 글 지어
- 나라 위한 글 부탁 받아 쓰기도

- 강력한 반군에 신라 수세 계속
- 가야산 홍류동계곡 즐겨 찾으며
- 물·바람 소리 음악 삼아 술 비워

- 저 구름처럼 자유롭고 싶지만
- 송악서 맑고 푸른 기운 감돌아
- 새 나라 위한 새 정신 완성키로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가야서당이 위치한 홍류동계곡 건너편에 정자인 농산정이 있어 최치원이 즐겨 찾았다 전해온다. 농산정은 조선시대 그를 기리기 위해 다시 세웠다. 합천군 제공
노산 이은상이 번역한 ‘가야산 홍류동(伽倻山 紅流洞)’이라는 제목의 최치원의 이 시는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으로도 알려진다.

홍류동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며칠 전 쏟아진 빗줄기로 불어난 물길에 휩쓸려 뒤엉킨 바위들이 낯설어서 크게 소리치는 것일지도. 덕분에 세상 시비 따위는 얼씬 못하니 마음은 고요하다.

가야서당 앞 계곡 건너 너럭바위 위의 작은 정자. 서생들이 정성을 모아 세우니 홍류동을 소요하다 피로하거나 마음이 심란하면 정자에 올라 몸을 쉬고 생각을 가다듬는다. 오늘은 서당에서 가져온 거문고를 탄다. 머릿속에 뒤엉켜있는 그간의 토막들을 선율에 실어 가지런히 정리해볼 요량이다. 유·불·도는 경전이 다수이고 당에서 배우기도 해 그나마 정리의 틀을 갖춰가나 신라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는 바가 적으니 불과 300여 년 전 진흥왕 조의 일도 제대로 더듬기 어렵다. 궁(宮)에서 읽었던 표(表)·서(書)·장(狀)·계(啓) 등의 기록과 기억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등에 의지하니 토막을 모아가는 격이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틀이 잡히고는 있다.

세속을 떠난 뒤로도 여러 글을 지었다. 다수가 불가와 관련된 글인데 이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같이 평소 존숭하던 이의 가르침이 후세에 본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뜻으로 짓기도 했고 개중에는 청(請)이 있기도 했다. 얼마 전(908년) 지은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가 그것이다. 중알찬(重閼粲·6두품 아찬의 최하급)으로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에 있는 이재(異才)가 나라의 경사를 기원하고 전쟁으로 생긴 죄과를 빌기 위해 팔각등루를 짓는다며 청해오니 그 갸륵한 뜻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물소리는 거르고 오직 선율에만 취한 듯 거문고 여섯 줄 위를 노닐던 손가락이 문득 멈춘다. 토막들이 나란히 한 줄이 된 모양이다. 때를 맞춘 듯 무영이 소반과 주병을 들고 다가오니 치원은 웃는다.

홍류동계곡을 따라 조성된 ‘가야산 소리길’은 이제 외국인 관광객에도 인기가 아주 높다.
■계림황엽 곡령청송

물소리는 세속을 끊어주고, 바람소리를 음악으로, 구르는 낙엽을 춤으로 술잔을 비우니 여기가 선경이구나 싶다. 전에 없이 환한 낯빛으로 즐겁게 술잔을 비우는 치원의 모습에 무영은 덩달아 설레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미심쩍다. 벌써 쉰 살을 넘기셨다. 한시도 고심을 멈추지 않으시니 머리는 하얗게 쇠었고 간간히 병치레를 하시지만 거동은 구름을 탄 듯 가벼우니 크게 염려되지는 않는다. 부인께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걱정하지만 무영은 선생에게 술은 신선의 차인 듯싶어 찾기 전에 알아서 준비한다.

저처럼 밝은 낯빛이면 오랜 고심이 결실을 본 듯싶은데 왜 마음 한구석은 서늘한지 까닭을 알 수 없다.

“자네 외출이 없는 지 꽤 오래지?” 불쑥 물으니 무영은 당황스럽다. 두 달이 넘었다. 뭐라 답해야 하나 싶은데 또 묻는다. “요즘 바깥세상은 어떤가?” 묻지 않던 물음이 의아하지만 무영은 답한다.

“후고구려로 기치를 세웠던 북쪽 궁예군은 네 해 전(904년) 마진을 국호로 삼고, 이듬해에는 도읍을 철성(鐵城·현 철원군)으로 옮겼습니다. 신라는 지난해 일선군(一善郡·현 구미시) 이남 10여 개 성을 서쪽 견훤에게 빼앗겼으니 지금 이 땅은 견훤과 마진이 공세의 강한 힘을 겨루고 신라는 수세입니다.”

“왕경(경주)의 민심은 어떠한가?” “봄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늦봄에는 서리가 내리더니 지난여름에는 우박까지 내려 모두가 불길한 징조라 흉흉할 따름입니다.” 치원은 깊은 한숨 대신 벌컥 술잔을 비운다.

“궁예라는 이는 어떠한가?” “미륵을 자칭하지만 강함이 지나쳐 내분의 기미가 보입니다.” “그런데 자네는 어찌….” 치원은 말을 멈춘다. 송악(개성)의 왕 씨를 말하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나는 한동안 청량암에 칩거해야 할 것 같으니 길을 나서게.” 무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혹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치원은 고개를 내젓는다. “내가 무슨. 지난번 모형 현준 스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런가 할 뿐이지.” 선생이 가야산 집에 들던 날 현준 스님이 한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을 말함이다. ‘신라는 떨어지는 누런 낙엽이고 송악은 푸른 솔의 기운’이라는 뜻이니 선생도 이미 마음을 두신 것인가 무영은 기쁘다.

■지옥은 업보에 따른 구분

치원은 흐르는 물길을 따라 홍류동계곡을 걷는다. 폭우가 쏟아지면 탁류가 되지만 며칠이 지나면 다시 옥수(玉水)가 되니 물빛은 눈이 부시도록 맑고 계곡을 따라 뿌리내린 수목들에 의해 솔향, 단풍향, 죽향 등이 번지니 그대로 찻물인가 싶기도 하다. 바람도 선선하다. 그에 묻어오는 숲속 온갖 향기는 또 어떠한가. 은근한 상큼, 달큼, 새큼, 풋풋, 때로는 푹 익은 듯한…. 자연은 이처럼 모든 것을 품고 서로가 어우러지니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지기도 하고 콧소리가 흘러나오게도 된다.

그러나 사람이 섞이면 금세 탁한 기운이 번지고 점점 구리다 못해 아귀다툼에 혀가 칼날이 되는 지경이니, 지겹다! 떠나려 하는 까닭이다.

불가에 연옥(煉獄)이다 뭐다 하는 지옥이 나오기 전에는 죽은 뒤 선업과 악업에 따른 구분은 저마다의 선택으로 살았던 삶 그대로의 나눔이었다 한다. 즉 선한 마음의 보시를 기꺼워했던 이들은 그만큼의 이들과, 사악한 혀끝으로 남을 속이고 괴롭혀 이득을 취하던 자들은 또 그만큼의 이들과, 흉악한 악심으로 사람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은 그런 자들로 나누어 놓으니 보시를 하던 이들은 서로 보살펴 날마다 즐거이, 사악한 자들은 끝없이 서로를 속이고 속는 고통으로, 흉악한 자들은 끝없이 서로를 죽여 한시도 뼈와 살이 성하지 않는다 하였다. 치원은 자신도 죽어서 그런 어떤 구분에 처해진다면 결코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싶다, 싫다!

두려워서 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옳으나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 터무니없는 질시를 외면하고 인내하는 것도 번거롭다. 도망치듯 은둔하여 안해며 식솔들까지 고행에 들게 하는 짓은 차마 더는 못할 노릇이다. 풀잎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모든 이가 무심히 스쳐가는 그런 존재로 자유롭고 싶다. 하지만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다.

동국에서 태어나 신라사람이 되어 신라의 관리로 살았다. 설령 황엽이 떨어지고 곡령의 청송이 푸른 가지를 펼치게 되더라도 그들도 동국 사람이고 동국 땅의 주인인 백성도 다르지 않다. 새로운 나라가 새로운 세상으로 주인인 백성을 보살피려면 그에 합당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미 가야산에 들기 전부터 얼개를 잡아 시작했으나 이제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혼신을 던지리라!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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